▲ 치악산신에게 올린 제물을 수부제를 지내기 위하여 여신목인 엄나무 앞에 진설하는 모습.(2018년 봄 성황제)

지연 유산이 매력적인 것은 사계절 모두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무가 움터 산야가 연한 초록으로 물드는 봄, 봄에 움튼 잎이 자라 그늘을 만들고 계곡과 폭포는 물이 넘쳐흐르는 여름, 모네의 정원보다 더 자연스럽고 화려한 가을, 나뭇잎을 털어내고 흰 눈에 덮여 수묵화로 변하는 산야(山野)는 모두 완벽하게 다른 풍경이다. 
필자는 가을을 좋아하지만, 자연의 네 가지 풍경 중 첫 번째를 고르라면 봄을 택하겠다. 이른 봄 계곡 길에서 만나는 버들강아지와 연초록은 자연의 네 얼굴 중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모습이다. 

그 중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신림 성황림(城隍林)이다. 숲 이름이 말하듯이 성황당(서낭)을 품고 있는 숲이다. 성황당에는 신을 모신다. 그러니 성황림은 신숲이고, 신의 뜰, 신들의 정원(庭園)이다. 근대 시기에 성황림의 가치를 먼저 알아본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성황림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보존하기 시작하면서 숲이 살아남았다. 이어서 1962년 우리정부에서도 천연기념물 제93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기 시작했다. 처음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당시에는 마을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며 지켜온 윗당숲과 아랫당숲 모두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했으나, 1972년 아랫당숲은 큰 홍수로 쓸려가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고 지금은 윗당숲만 천연기념물로 관리되고 있다.     

일제감점기 일본인들이 성황림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엄격하게 관리하기 시작한 것은 성황림의 식생(植生) 때문이다. 성황림에는 각시괴불나무, 음나무, 졸참나무, 층층나무, 피나무, 가래나무, 쪽동백나무, 들메나무, 박쥐나무, 산초, 보리수, 광대싸리, 복분자딸기, 찔레, 노박덩굴, 으름덩굴과 초본 식물로 숲을 이루고 있다. 일본인 식물학자들은 원주 성황림을 한반도 중부 온대 지역을 대표하는 숲으로 파악한 것이다. 숲이 우거지고 식생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치악산 상원사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고 풍부한 계곡이 숲을 지나고 있어 다양한 동물들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한다. 

원주 성황림은 식생이 다양하여 야외 식물박물관으로 학술적 가치가 크지만, 성황림이 더 특별한 것은 성황당에서 지내는 성황제의(城隍祭儀) 때문이다. 성황림에서는 봄가을 두 번 마을 사람들의 평온을 기원하는 제례를 지내는데 제의가 시작된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성황림을 소개하는 문화재청 누리집의 안내문에는 성황제의 기원을 100여 년 전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100년이면 고작 삼대(三代)인데 필자가 20여 년 전 만난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전 선대부터 성황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성황림에서 지내는 성황제는 우리나라 곳곳에서 지내는 성황제와 달리 특별함이 있다. 먼저 성황제를 지내는 제의 날이다. 대부분의 성황제는 일년에 두 번, 삼짓날(음력 3월 3일)과 중양절(음력 9월 9일) 제의를 지낸다. 삼짓날과 중양절을 제의 날로 택한 것은 양수인 3과 9가 겹친 날로 양의 기운이 넘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주 성황림의 봄 제의는 삼짓날이 아니라 사월 초파일 부처님오신 날이다. 사월 초파일 성황제를 지내는 곳은 원주 성황림이 유일하다. 

필자는 원주 성황림 제의가 삼월 삼짓날이 아니라 사월 초파일 날 성황제를 지내는 것은 궁예 대왕의 유습으로 생각한다. 고대에 성황은 한 지역을 지배하는 권력자를 의미한다. 후삼국을 통일한 궁예는 성황림에서 멀지 않은 석남사에 머물고 있었으니 궁예가 이 지역의 성황이었다. 더구나 궁예 대왕은 스스로를 미륵이라 여겼으니 사월 초파일 성대하게 제의를 지냈을 것이다. 궁예 대왕은 석남사에 머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고, 892년 원주 동쪽 지역인 평창, 영월, 정선을 지나 강릉을 정벌하는 동정(東征) 길에 오른다. 치악산 석남사에서 시작한 궁예의 동정은 896년 철원에서 새 나라를 세우면서 꿈을 이룬다. 

성황림은 궁예 대왕이 머물던 석남사의 관문이다. 석남사 북쪽은 험준한 치악산이 가로막고 있어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고 석남리 일대에서 바깥세상으로 열린 길은 성황림이 있는 상원사계곡 길이 유일하다. 그런 까닭으로 성황림은 궁예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첫걸음을 성황림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 이전에 이곳의 지리가 말해준다. 이 지역의 성황이었던 궁예 대왕은 성황림에서 제의를 열고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새로운 나라 건설을 이룰 수 있도록 간절하게 기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성황림은 궁예 대왕의 기원을 안고 있는 숲이다. 

또 하나 원주 성황림의 성황제가 특별한 것은 제례의 내용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황당에서 지내는 제례에서는 마을사람 각자의 건강과 복 그리고 마을 공동체의 번영을 기원하지만 원주 성황림 제의에서는 사람을 넘어 숲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와 풀 그리고 숲에 깃들어 사는 동물이 모두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함께 기원하는 수부제를 지낸다. 수부제는 성황당 안에 모셔진 치악산신에게 올린 제물 중 일부를 성황당 왼쪽 여신목(女神木) 앞에 올리고 숲에 사는 모든 생명의 건강을 기원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뭇 생명의 평온을 기원하는 일은 다른 지역의 성황제의에서 볼 수 없는 사례이다. 지금 원주가 국내외에서 생명 도시로 자리매김 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다.     
10월 23일 원주 성황림에서 가을 성황제의가 열린다. 복자기 나무가 곱게 물든 가을 정취는 비교할 대상이 없다. 그곳에서 가족의 건강을 기원해 보는 일도 원주시민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권리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