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산 추월대에서 바라본 치악산. 안석경은 구룡사를 지나 지금은 사라진 대승암에 머물며 비로봉에 올랐다.

예로부터 경치가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사원(寺院)이나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이 있다. 국가의 도읍지 도성 안팎에는 역대 왕의 후원으로 지은 규모가 큰 도회사원이 건축되었지만 신라말 왕권이 약해지고 지방 호족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도 사원 건축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종교적으로도 선종이 유행하면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을 개창한다. 모두 경치 좋은 산속 명승지에 건축된 산사(山寺)이다. 당시 원주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사자산문(獅子山門,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현재 법흥사)도 구산선문 중 하나이다. 사원 건축에는 많은 재원이 소요되므로 당시 세워진 사원의 규모로 그 지역 호족의 세력을 짐작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은 경치 좋은 명승지를 찾아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것을 즐겼다. 이는 오래된 전통으로 신라 화랑(花郞)의 수련법이기도 하다. 가을이면 주말마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산을 찾아 떠나는 버스 행렬이 길게 줄지어 있는 풍경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화랑의 후예다운 모습이 아닐까!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에는 어김없이 산사가 있다. 조선시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제사 터였던 명산 동악에도 크고 작은 사원이 남아 있다. 모두 창건 연원이 오래된 고찰이다. 

옛 사람들이 만난 치악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문장력이 좋은 선인들은 산을 찾아,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를 유산기(遊山記)라 한다. 평생 학문에 정진했던 퇴계 이황(1501~1570)도 즐겨 산을 찾았다. 퇴계 선생은 시에서 "사람들 말하길 글 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 하지만,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라고 읊었다. 선생에게 산은 책과 같았고 산을 찾는 일은 독서 보다 좋은 공부였다. 치악산을 찾아 유산기를 남긴 문객 중 원주와 인연이 깊은 사람은 안석경(安錫儆, 1718-1774)이다.

안석경은 충주사람으로 1718년 남한강이 멀지않은 가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중관(安重觀)은 홍천, 제천현감을 지낸 관리이고 회와집(悔窩集)을 남긴 저술가이다. 20대 청년시절을 아버지의 부임지인 홍천과 제천에서 보냈다. 23세 되던 해에는 원주 부론면 흥원으로 옮겨 살았다. 흥원창으로 번화했던 부론은 안석경의 고향 가흥과 멀지 않은 곳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757년 원주 안산(安山)으로 다시 이사하여 살았다. 1765년 8년 동안의 원주 생활을 마치고 다시 이사하여 말년을 보냈는데 그곳이 바로 횡성의 삽교리이다. 그의 호 삽교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글을 쓰며 말년을 보낸 마을 이름에서 취한 것이다.     

안석경은 삼십 대 초반까지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응시했지만, 시험을 볼 때 마다 떨어졌다. 세상이치에 밝고 뛰어난 문장가인 청년 석경에게 관직에 나갈 운이 없었나 보다. 50을 한해 앞둔 1767년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있던 민백흥(閔百興)이 안석경의 재능을 귀하게 여겨 조정에 천거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벼슬살이보다 횡성 삽교리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삶을 마칠 때까지 후학을 가르치고 글을 쓰며 보냈다. 이 때 쓴 글을 모은 책이 삽교만록이다.  

삽교만록은 모두 6권 5책으로 대략 300여 항목을 넘는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횡성 삽교리에 은거하던 시절에 쓴 것으로 대부분 1770년부터 1773년 사이에 저술된 것이다. 책의 서문은 안석경의 동생인 안석임(安錫任)이 1786년에 작성한 서문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석경이 죽은 뒤 동생이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안석경이 치악산을 방문한 것은 모두 두 번이다. 첫 번째 방문은 28세 때인 1746년이고, 두 번째는 34세 때인 1752년 이다. 두 번 모두 구룡사 방면으로 동악(東岳)에 들어와 구룡사와 대승암을 지나 비로봉에 올랐다. 과거를 포기하고 횡성 삽교로 이사하여 처사(處士) 생활을 시작하기 전이다. 첫 번째 방문은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나, 1752년 4월 7일부터 10일 동안 치악산에 머문 기록은 '유치악대승암기(遊雉岳山大乘菴記)'라는 제목으로  <삽교만록>에 수록되어있다. 271년 전 안석경이 찾았던 치악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가 치악산 대승암에 가려하자 친구들은 안석경의 치악산 산행을 만류한다. 이유는 치악산에 큰 호랑이가 살고 있는데 근년에 대승암 사람을 잡아먹었으니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친구들의 만류에 안석경은 '호랑이는 사람을 먹을 수 없다네. 사람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반드시 사람의 도리를 잃었기 때문일세. 사람이 호랑이를 만나더라도 그 심지가 굳어서 흔들리지 않아 위로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래로 땅이 있다는 것을 알며 그 가운데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짐승이 사람에게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네'라고 말하며 입산한다.

안석경은 구룡사 부근 백련당에서 하룻밤 잠을 자고 구룡사 스님과 함께 대승암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인적이 없어서 산행도중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고도 한다. 백련당은 구룡사 근처의 부속 건물이고 대승암은 구룡사에서 멀리 떨어져 비로봉 오르는 길에 있는 암자이다. 산중 깊은 곳에 있어 공부하는 선비들과 학승들이 살만한 암자이다. 안석경은 대승암 주변 치악산 풍광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암자 뒤에는 바위 봉우리가 우뚝 솟았는데 구름 덮인 나무가 어두침침하고 가물가물하다. 암자 앞에는 거북바위가 있어서, 우뚝하게 절벽에 임해 있다. 소나무와 회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고, 두견화가 빙 둘러 피어 사람을 환하게 비춘다. (중략) 동북쪽은 멀리 서너 고을의 산들이 흰구름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가까이 있는 벼랑에는 사슴이 있어 때때로 멈추어 서서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하다. 그 울음소리는 어리숙하고 그 뿔은 높다. 새 울음소리도 여러 종류인데 제각기 특이하다. 이곳이 으슥하고 깊은 곳임을 알 수 있다.'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벼랑에는 사슴이 노는 270여 년 전 치악산 풍경이다. 대승암 터는 어디에 있을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