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6년 거돈사지, 법천사지, 흥법사지, 흥원창지를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하기 위한 문화재 위원회 심의자료.

관광을 즐기는 서구인들이 처음 방문하는 나라에서 여행지를 선택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은 세계유산이라고 한다. 여행 대상지로 세계유산 보유도시를 찾는 비중은 특히 유럽인들이 더욱 높다. 유럽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유산이 많이 있어 일상에서 세계유산의 가치를 경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유산은 유네스코에서 검증한 것이니 낯선 나라를 여행할 때 이보다 더 믿을만한 기준은 없을 것이다. 세계적인 관광도시가 되려면 도시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일이다.

세계유산은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1972년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 협약을 채택하면서 등재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은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해야 할 자연유산과 문화유산, 복합유산으로 구분하고 있다. 자연유산은 특이한 지질 현상이나 동식물의 서식지 등 말 그대로 보존 가치가 큰 자연이 대상이다. 문화유산은 기념물, 건축물, 기념 조각 및 회화, 고고 유물 및 구조물, 금석문, 혈거 유적지 및 혼합유적지 가운데 역사, 예술, 학문적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을 말한다. 복합유산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이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유산이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 파급효과는 기대 이상으로 크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세계유산을 보유한 도시는 대체로 관광객이 50% 이상 증가한다고 한다. 특히 서양인들의 여행지 선정 기준으로 작용하니 외국 관광객이 증가할 것이다. 문화유산 답사는 시간이 오래 소요되기 때문에 자연히 여행지에 머무는 체류시간이 길어져 숙박업이나 요식업을 비롯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된다. 체류형 관광객 증가라는 경제적인 효과 외에도 세계유산은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쳐 등재되기 때문에 세계인이 인정하는 것이니 유산을 보유한 시민들의 자부심 또한 커질 것이다.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유산이 되려면 먼저 국내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돼야 한다. 우리나라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는 문화재청에서 심의하고 관리한다. 각 나라에서 지정한 세계유산 잠정목록 중에서 매년 대표 유산 한 건을 유네스코에 제출하여 심의하게 되는데 심의 과정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국가의 외교 역량이 총동원되어 유네스코 회원국들을 설득하는 과정은 총 없는 전쟁과 같다. 2022년 기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유산은 1,157건이고 우리나라 유산은 15건에 불과하다.

필자는 2016년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신청서를 제출한 경험이 있다. 처음 세계유산 분야 전문가를 만나 조언을 구했을 때 그가 필자에게 해준 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힘든 일을 왜 시작하려 합니까? 세계유산 등재 과정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그가 필자에게 한 말인데, 그 일을 회피할 수 없었다. 2016년 3월 지광국사탑이 서울을 떠나 대전 문화재보존과학 센터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는 필자가 머릿속에 담고 있는 지광국사탑 환수전략 중 하나였다. 

필자가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대상으로 삼은 것은 거돈사지와 법천사지, 흥법사지 그리고 흥원창이었다. 남한강과 섬강 물길로 이어지는 곳에 세워진 강변 사원(江寺)과 그 사원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흥원창이다. 문제는 흥원창이었다. 흥원창은 위치조차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조사와 연구도 없었으니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문화유산이다. 세계유산 잠정목록 대상이 되려면 먼저 국가 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관리 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흥원창은 위치조차 분명하지 않으니 애당초 세계유산 잠정목록 대상이 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흥원창을 제외하면 거돈사지와 법천사지, 흥법사지 등 폐사지 세 곳을 연결하고,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1천 개 넘는 폐사지와 차별지을 수 있는 특징적인 요소가 사라지게 된다. 흥원창은 원주에 남아 있는 세 곳의 폐사지를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 분과 심의 결과 보류였다. 보류 사유는 흥원창과 흥법사지에 대한 조사연구를 진행한 다음에 다시 신청하라는 것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성과도 있었다. 문화재위원회 심의 과정에서 한 위원이 질문하였다. '폐사지는 건물도 남아 있지 않은데 무얼 가지고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하는가요?' 필자가 대답하였다. '우리나라 건축물은 서양과 달라서 나무와 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불에 타면 초석(주춧돌)과 기단, 기와만 남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복궁도 불에 타면 초석과 기단만 남습니다. 불에 타버렸다고 경복궁이 하찮은 문화유산은 아니지 않습니까!' 편견이지만 당시까지 폐사지가 단독으로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사례가 없었으니 의문을 가질 만도 하다. 양주시에서는 세 차례 도전 끝에 2022년 회암사지를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하였다. 2022년까지 국내 잠정목록에 등재된 유산은 13건이다. 

지금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리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에서는 1~6세기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 '가야'를 대표하는 7개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하고 17일 최종 심사를 앞두고 있다. 문화재청장은 물론이고 정부의 고위관료와 문화유산이 소재한 도지사와 시장들은 지금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리는 리야드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장에 원주시장이 서게 될 날은 언제일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