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15년째다. 시간의 흐름만 쏜살이 아니라 주변 환경 변화도 격세지감이다. 이제는 마을 공동화(空洞化)가 아니라 마을 소멸을 피부로 체감할 지경이다. 아이가 없으니 마을 역사도 시한부 아닌가? 공동체 의식이 살아있는 사람 사는 그런 마을 역사 말이다.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마을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다" 7년 전 우리 마을의 정체성 발굴과 복원, 경관 및 생태사업을 서둘러 시작한 이유다. 이 사업들은 하나같이 고증을 거쳐야 하는 관계로 마을에 남으신 소수 원로들의 여명(餘命)과 같이한 긴박한 사업들이었다.

 지난해 준공한 강원도의 '기업형 새농촌 사업'과 농림부의 '마을만들기 사업'은 시의적절한 주제 선정과 사업비 배분의 선택과 집중으로 우리 마을이 비로소 다시 태어나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관계 기관과 부서에 깊이 감사드린다. 

 "역사는 쓰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이들 사업을 통해 왕건정(王建井) 복원과 공원화, 왕건정(王建亭) 개명으로 '태조왕건길'(원주굽이길 8코스)의 정체성과 콘텐츠가 강화된 점, 마을 앞 섬강 제방뚝의 벚꽃길 조성으로 단위 마을로서는 원주시 최장(3Km)의 벚꽃길이 완성되어 향후 문막은 물론 원주권의 대표적인 걷기 명소로 부상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백문이 불여일견" 우리가 일본 농촌으로 발길을 돌린 이유다. 비록 역사적으로는 가깝고도 먼 나라이지만 우리보다 앞서 각종 농촌문제를 극복해 나아가고 있기에 그 궤적을 따라가 보기로 마을 리더들은 결의하였다. 마을 출신 일본 사업가와 소통하며 일과가 끝난 저녁에 단원들이 함께 모여 방문 일정과 주제를 짰다.

 우리 마을과 기후, 지형조건이 비슷한 야마나시현 고후시의 전원 마을을 택했다. 연수비용도 전액 각자 부담했다. 사업가적 안목과 리포팅 능력까지 겸비한 기업체 대표, 전직 대기업 중역 출신, 전직 교사까지 망라하여 '일본농촌방문단'을 꾸렸다. 

 이번 연수의 주요 목적은 우리 마을에서도 적용 가능한 효율적인 '생활쓰레기 분리배출 방법' 모색과 '농협 농산물직매소'를 통한 지산지소 운동의 사례 연구 그리고 '마을 경관조성' 사례 연구였다. 이번 방문을 통해 단원들이 공감했던 몇가지 사례를 소개해 본다.

 첫째, 가정, 마을 단위에서 철저하게 쓰레기를 선별하고 분리하여 배출하기에 운반 및 소각장에서의 후처리 과정과 비용이 대폭 간소화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소수의 직원으로도 소각장 운영이 가능한 결정적인 이유다.

 둘째, 개인도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들을 직접 소각장까지 운반하여 저렴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소각장을 시민들에게 상시 개방하고 청결함을 유지함으로써 소각행정의 신뢰도를 제고하고 있었다. 

 셋째, 냄새나고 먼지 날리고 지저분한 소각장이 아니라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일반 행정기관을 연상케 하는 시설이었고 소각열을 이용한 대중 목욕탕을 직접 운영하여 인근 시민들에게 아주 저렴하게 공급하고 있었다.

 넷째, 다수 지자체가 조합 형식으로 광역소각장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었으며 도시 확장으로 주거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재건축 예정이라는 것으로 봐서 일본에서도 소각시설은 주민 기피시설임이 분명했다. 결국, 이 단출한 쓰레기 소각장 운영의 요체는 '원인제공자 처리의 원칙'에 입각하여 소각장 도착 전에 철저하게 분리 배출하는 시민정신이 아닌가 생각해 봤다. 

 다섯째, 품목별 전문농협이 대세인 유럽,북미와는 달리 일본농협(JA)은 요람(농협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탄생)에서 무덤(농협이 운영하는 장례식장에서 영결)까지 주민생활의 대부분을 아우르는 종합농협을 지향한다. 따라서 지역의 경제,사회,문화적 욕구를 광범위하게 충족시켜 주는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잘못 운영시 조합원과 지역민의 다른 선택지를 제한하고 건전한 지역자치를 가로막는 흡혈귀로 전락할 수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농협과 같은 방향을 지향하는 국내 농협도 '조합원을 위한 농협이 아니라 직원을 위한 농협'으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적절히 견제할 법적, 제도적 장치의 보완은 물론 지속적인 협동조합 정신의 구현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섯째, 국내 농협 하나로마트와 같은 성격의 A-COOP(종합유통센타)와는 별도로 독립된 매장에서 '농산물직매소'를 운영하면서 지역의 1차 농산물과 가공품 그리고 각종 공예품까지 지산지소(地産地消) 운동을 실천하는 거점으로서의 일본농협의 역할은 국내 농협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지산지소 운동이 활성화되면 농산물 과잉생산 문제와 수익성 악화 문제를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방문단은 한일 농촌 문화의 차이는 인정하면서도 유사한 점이 많음도 직접 목격한 유익한 연수였다. 일본 농협도 우리의 직매소 방문을 홈페이지에 홍보하며 지속적인 교류를 희망하고 있다. 향후 상호 연례적인 방문을 추진해 마을 비전의 안목을 넓히고 이를 실행하는 선도마을을 꿈꾸고 있다.

이준희 왕건마을회 사무장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