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주 4개 단관극장의 상영 프로그램을 소개하던 안내판. 이제는 추억의 풍경이 됐다.

 천 년 전 원주 땅에서 진리의 법등을 밝혀온 절터 이야기가 아직 남았지만 이번 글에서는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요즘 원주사회의 갈등으로 번진 아카데미 극장 이야기다. 아카데미 극장은 필자가 몸담아 온 30여 년의 공직생활 중 안타깝고 아쉬운 실패의 경험을 남겨주었다.

2006년 아카데미 극장이 문 닫은 후 다른 네 개의 극장처럼 사라질 위기를 여러 번 넘겼다. 필자가 공직 생활 중 추진했던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 공모사업에 원주시가 선정되었다면 아카데미 극장은 철거의 위기에서 벗어났을 터인데 공모선정에 탈락하면서 수명만 연장한 격이 되어 또 다시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니 필자의 책임이 크다. 

60년대 이후 대형극장이 다섯 곳이나 운영되었던 원주는 '극장도시'이다. 극장도시 원주를 알려주는 마지막 문화유산, 아카데미 극장은 원주의 근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원주 도심에 있는 강원감영이 조선시대 500년의 원주 역사를 대표한다면 아카데미 극장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원주 재건 과정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아카데미 극장이 사라지면 해방 이후 현대까지 원주의 역사를 말해줄 건축물은 사라지고 원주의 근대는 공백이 된다.

또한 아카데미 극장은 문화시설이 전무했던 과거 원주의 문화예술이 움텄던 온상이다. 반공 궐기 대회와 새마을 대회 같은 군중집회가 열리는 광장이기도 했으니 원주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건축물이다. 그러므로 아카데미 극장은 지워서는 안 될 원주 근현대 역사의 일부이고 아카데미 극장을 향유했던 수만 시민들의 추억이 남아 있는 원주 사람들의 기억 저장소이다.

아카데미 극장 철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아카데미 극장은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 사업에 선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문화재적인 가치가 없다는 것과, 낡아서 안전을 담보하지 못해 수리를 위한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아카데미 극장이 낡은 것과 수리를 위해서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 사업 공모에서 탈락했기 때문에 문화재적인 가치가 없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 사업은 기존의 개별 건축물을 중심으로 한 '점' 단위 등록문화재 관리체계를 '선(線)', '면(面)'으로 확장하여, 근대건축유산 등 역사문화자원이 집적된 근대역사문화공간을 보존과 활용을 통한 지역재생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공모사업이다. 사업의 전제가 개별 건축물의 가치보다는 근대 건축물이 밀집된 공간을 보존하기 위한 것으로 당초 원주는 선정되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사업 공모에 나선 것은 당시로서는 아카데미 극장 철거를 막을 수 있는 위한 유일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공모사업에 선정되면 500억 원의 사업비(국도비 75%)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도시들이 공모에 참여하였다. 원주시는 2019년과 2020년 각각 공모에 참여하였다. 두 차례 모두 평원동, 원인동, 중앙동 일대 약 11만㎡의 구역이 사업 대상이었다. 심사는 문화재청 근대문화재 분과 문화재위원들과 관련분야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하여 1차 서류심사, 2차 현지실사, 3차 종합심사에 이르기까지 엄정하게 진행되었다.

다른 경쟁 도시와 비교하여 원주시는 등록기준인 50년 이상 건축물이 현저하게 적은 7개 동 뿐이었다. 50년 이상 건축물이 수 십 동인 경쟁도시와 시쳇말로 1대100의 경쟁인 셈이었으니 누구나 1차 탈락이 예견되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두 차례 모두 쟁쟁한 경쟁 도시들을 제치고 2차 심사까지 통과하고 최종심사에서 탈락하게 된다. 원주시가 선정되지 못한 것은 건축물의 밀집도가 경쟁도시보다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의 공모 심사에서 모두 2차 심사까지 통과될 수 있었던 것은 아카데미 극장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가치 때문이었다. 당시 현지를 방문한 심사위원 대부분은 아카데미 극장에 주목하고 보존가치가 크다는 것에 이견이 없었다. 나아가 심사위원 중 일부는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 사업 대신 아카데미 극장만 개별 등록문화재로 신청하라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역설적이지만 두 차례의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 공모사업에 선정되지 못하였지만 아카데미 극장의 보존가치를 확인한 셈이다. 그러니 공모사업 선정에서 실패했다는 이유로 아카데미 극장이 문화재적인 가치가 없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속담이 있다. '늙은 사람' 노인과 젊은 세대가 공존하는 도시가 건강한 도시가 되는 것처럼, 도시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낡은 건물'과 신축 건물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방문객이 넘쳐 나는 이름난 관광도시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안전도 A등급의 건물이 아니라 안전도가 낮은 낡은 건축물(문화재)들이다. 약해지고 병든 '늙은 사람'이 치료비가 많이 드는 것처럼 '낡은 건축물' 역시 보존에 따른 비용이 많이 발생하지만, 도시의 역사를 품고 있는 낡은 건물 문화재를 보존하는 일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해야 할 의무이다.

보존비용이 많이 든다고 해서 아카데미 극장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바라보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황혼의 반란'이 떠오른다. 생산력이 떨어지고 소비만 하는 노인은 사회의 부담이 되는 쓸모없는 존재이므로 병원 치료 대신 없애려는 젊은이들과, 그에 맞서 숲으로 들어가 '흰 여우들'이라는 집단을 이루고 살아남으려 애쓰는 노인들의 이야기 말이다. 경로효친을 존중하는 우리와 먼 서구 소설가의 상상이지만, 지금 원주에서 벌어지는 일과 같아서 섬뜩하다.

정치인이 되기 전, 기자와 취재원으로 필자가 만난 원강수 시장은 원주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원강수 시장은 효성이 지극한 분으로 알고 있다. 그러기에 4월 11일 아카데미 극장 철거에 대한 그의 발표는 더욱 놀랍고 안타까웠다. 원강수 시장의 생각은 아닐텐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을 빌리자면, 도시의 역사를 품고 있는 '낡은 건물'을 없애려는 것은 '늙은 사람'을 배척하는 것과 같다. 누가 노인을 죽이려 하는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