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천사 금당지에서 바라본 지광국사 승탑원. 경사진 산비탈을 깎고 석축을 쌓아 대지를 조성하였다. 높이에 따라 층층이 조성된 대지와 대지를 연결하는 여러 계단을 오르면 마지막에 승탑원에 이르게 된다.

살아서 승려의 최고 지위인 왕사와 국사를 지내고 고려 전기 4명의 국왕으로부터 최고의 예우를 받았던 지광국사 해린 스님이 돌아가시자 고려 왕실은 스님의 장례에 최선을 다했다. 문종 임금은 국가의 재정(財政)인 원주 흥원창의 곡물로 장례식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고 특사를 보내어 조문하였다. 장례식뿐만 아니라 해린 스님이 살아계실 때 명성에 걸맞는 평가와 예우는 스님의 무덤 조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전통사회에서는 무덤을 조성할 때 엄격한 규정을 따랐다. 무덤의 규모와 무덤에 설치하는 비석과 석등(石燈), 석인(石人), 석수(石獸) 등 무덤을 치장하는 돌로 만든 장식물은 신분과 계급에 따라 엄격하게 제한하고 차등을 두었다. 묘지 제도를 처음 정한 당나라에서는 정5품 이상 고위 관리의 무덤은 비석 머리(이수螭首)와 비석 받침(귀부龜趺)이 있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고 그 아래 관리의 무덤에는 비석 끝이 둥근 작은 비석을 세웠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묘지 제도가 있었는데 정3품 이상 관리의 무덤에는 신도비를 세우고 그 아래 관리의 무덤에는 묘갈(墓碣)이라고 하는 비석 머리가 없는 작은 묘비만 세울 수 있었다. 이처럼 살아 있을 때 신분과 계급은 죽은 후 무덤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해린 스님이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마치자 본격적인 무덤 조성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시작된 것은 법천사 동쪽 산기슭 양지바른 곳에 3동의 건물을 짓는 일이었다. 승려가 돌아가시면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무덤을 조성하는데 보통 사람과 달리 탑을 세워 유해를 모신다. 이를 승탑(僧塔)이라 한다. 일반적인 승려의 경우 승탑과 비석만 세우면 무덤 조성공사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지광국사 해린 스님의 무덤은 특별했다.

승탑과 탑비를 에워싼 북쪽과 동쪽, 서쪽 세 방향에 1동씩 모두 3동의 건물을 지었다. 승탑과 탑비를 세우고 3동의 건물을 지은 곳은 경사진 산비탈이다. 산비탈에 탑과 탑비, 건물을 세우려면 평탄한 대지를 조성해야 한다. 건물 북쪽을 깍아 내고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석축을 쌓았다. 건물 앞에도 잘 다듬은 장대석을 사람 키보다 훨씬 높게 쌓아 대지를 조성하는 정교한 토목공사가 필요했다. 

탑과 탑비, 3동의 건물 남쪽 아래, 높은 장대석 석축 앞에는 동서로 길게 행랑(行廊)을 건축하고 중앙에 출입문을 두었다. 승탑과 탑비 그리고 탑비를 에워싸고 있는 건물들을 포함하여 승탑원(僧塔院)이라 부른다. 법천사 금당에서 승탑원까지 이르는 길 곳곳에는 기와처럼 진흙을 구워 만든 전돌(磚石: 보도블럭)로 포장하고 경사진 곳은 넓고 편평한 돌인 판석(板石)을 깔아 편하게 걸을 수 있게 하였다. 길 옆에는 높이에 따라 층층이 대지가 조성되었고 처마가 닿을 만큼 여러 동의 건물이 이어졌는데 비를 맞지 않고도 스님의 승탑이 있는 곳까지 이를 정도이다. 전례가 없는 특별한 무덤이다. 무덤을 넘어 해린 스님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한 특별한 추모 공간을 조성한 것이다.

승탑과 탑비의 북쪽에 있는 정중앙의 건물은 동쪽과 서쪽 2동의 건물보다 훨씬 높게 지어 특별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중앙 건물은 국왕의 공간인 대궐의 정전(正殿)처럼 월대 형식을 따라 아래 기단이 돌출된 2중의 기단 위에 건물을 세웠다. 중앙 건물의 기단은 크고 작은 돌을 조각하여 짜 맞추었는데 마치 조각보나 몬드리안의 작품을 보는듯하다.

어떤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건물이었기에 부처님을 모신 금당보다 더 공을 들여 만들었을까? 필자는 물론 연구자들은 대체로 중앙 건물은 입적하신 해린 스님의 영정(影幀)을 모셨던 건물로 짐작한다. 그러면 동쪽과 서쪽의 건물은 어떤 용도로 사용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었을까? 중앙 건물보다 기단을 낮게 하여 위계를 구분하였지만 2동의 건물도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과 건물에 오르는 계단에 난간을 갖춘 것으로 보아 공들여 지은 건물이다.

특히 서쪽 건물터에 남아있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주춧돌은 법천사는 물론 국내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격이 높은 주춧돌이다. 몇몇 연구자들은 이 2동의 건물이 해린 스님 외의 또 다른 스님의 초상을 모셨던 조사당(祖師堂)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승탑원은 해린 스님의 승탑을 모신, 해린 스님만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조사당보다는 해린 스님을 위한 제를 지내기 위한 재실(齋室)이거나, 아둔한 상상이지만 해린 스님이 국왕으로부터 받은 진귀한 선물들을 보관하는 유품 보관실은 아니었을까? 여신 뮤즈(muse)의 보물창고 무세이온(museion)과 같은….

 

박종수 전 원주시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