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과 시험장에서 발탁되어 국왕으로부터 대덕(大德)이라는 지위와 강진홍도(講眞弘道)라는 법호를 받고 원주로 돌아온 해린 스님의 귀향은 화려했지만 길지 않았다. 강연과 토론으로 치러진 승과 시험에서 스님의 실력이 특별하게 뛰어났기 때문이다. 대덕(大德)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014년 현종 임금은 해린 스님의 지위를 한 계급 높여 대사(大師)의 지위를 내리고 2년 후에는 '명료돈오(明了頓悟)'라는 두 번째 법호를 내리고 개성으로 모셔 설법을 요청한다. 

1021~1030년 무렵 현종 임금은 스님의 지위를 한 단계 높여 중대사(重大師)가 되었다. 아울러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이라는 법호를 올리고 수다사(水多寺)를 맡도록 하였다. 수다사는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에 있어 '수항리 절터'라고 알려졌는데, 1983년 '太白谷 水多寺(태백곡 수다사)' 라는 글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수다사(水多寺) 터임을 알게 되었다. 

현종 임금 뒤를 이어 국왕이 된 덕종(悳宗) 임금도 해린 스님에 대한 신뢰와 존경하는 마음이 깊었다. 재위 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스님의 지위를 두 단계나 높여 삼중대사(三重大師)를 거쳐 수좌(首座)로 추대하였다. 덕종의 뒤를 이은 정종 임금은 스님을 궁궐로 초청하여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연하게 하였고, 1045년(靖宗 11)에는 지위를 올려 승통(僧統)이 되었다. 

해린 스님이 승계를 받고 고려의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앙에서 활동한 것은 8대 현종(1009∼1031), 9대 덕종(1031∼1034), 10대 정종(1034∼1046), 11대 문종(1046∼1083) 임금 때까지 4명의 국왕이 재위할 때이다. 이 4명의 국왕은 해린 스님을 궁궐로 모시고 설법을 청해 듣기도 하고, 스님의 지위를 높여주고 법호를 내려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스님의 설법을 들은 국왕들은 비단으로 만든 귀한 옷(가사)을 예물로 드리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현종 임금 때부터 문종 임금까지 4대를 이어 역대 국왕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고려 왕실의 가계와 무관하지 않다. 현종 임금의 아버지는 왕건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왕욱인데, 왕욱은 자신의 형 경종 임금이 죽자 형수이자 조카딸인 경종의 왕비 헌정왕후와 불륜으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현종이다. 현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었고 아버지 역시 일찍 죽어 고아가 되었고, 왕실의 권력 투쟁에 휘말려 개성에서 쫓겨나 승려가 되었다. 

승려가 된 후에도 이모인 천추태후에 의하여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는 불우한 유년을 보냈다. 그런 까닭에 현종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당시 정치 세력과 불교계의 역학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린 스님이 속한 법상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현종의 뒤를 이은 덕종, 정종, 문종은 모두 현종의 아들이니 해린 스님과의 네 명의 국왕과의 관계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인 관계 외에도 해린 스님이 높은 지위에 오르고 역대 국왕으로부터 존경받았던 출세의 비결은 스님의 탁월한 설법(說法, 강연)이었다. 승과에서 발탁될 때도 강연과 토론으로 좌중을 압도하였고, 이후 국왕의 초청으로 개성에 있는 큰 사원이나 궁궐에 초청되어 설법할 때마다 최고의 찬사와 존경을 받았다. 비석의 기록이 묘사한 해린 스님의 설법 장면을 보면 해린 스님이 얼마나 경전 해석에 밝고 강연과 문장력이 탁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021년 개성의 중흥사(重興寺)에서 열린 여름 결제(結制) 중에 강경법회(講經法會)가 있었는데, 해린 스님이 설법을 하니 '그 법이 중생들에게 두루 미쳐 마치 새벽 기온처럼 서늘하게 만들어 주었다.' 거나 '스님은 아무렇게나 말을 하여도 곧 훌륭한 문장을 이루게 되니, 혜거(惠璩 : 중국 북송때 승려)의 문장력도 혼비백산하였고, 문장을 나누면 척척 음운에 부합하였으니 담빙(曇憑: 음악에 뛰어난 승려)의 음운학(音韻學)의 실력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현종 임금과 그의 두 아들인 덕종, 정종으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고 승통이 된 해린 스님은 현종의 셋째 아들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해린 스님은 승려로서 절정기를 맞이한다. 주요 사찰의 주지를 거쳐 드디어 왕사가 국사로 추대된다. 왕사와 국사는 다른 승려와 달리 왕이 맞절을 하여 예우한다. 비석에는 해린 스님이 문종 임금으로부터 왕사와 국사로 추대되는 과정과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문종 임금이 해린 스님을 예우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1056년 1월 문종 임금은 특별히 친서(國書 국서)를 보내 초청하였다. 여러 신하를 보내되, 세 번이나 되풀이하는 삼반(三反)의 예(禮)를 갖추었다. 이어 다시 중추원사(中樞院事) 이유충(異惟忠)을 보내어 왕이 서명하고 직인을 찍은 편지와 함께 비단옷과 은과 놋쇠로 만든 그릇과 귀한 차(香荈 :향천) 등을 보내어 예를 표하였다. 국사는 굳게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11월 4일 임금의 가마가 내제석원(內帝釋院)으로 행차하여 스님께 절을 올리고(禮拜 예배)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임금의 가마에 임금과 같이 타고 다녔다. 1057년 이르러 '융소(融炤)'라는 법칭(法稱)을 올렸다. 1058년 5월 초하루에 임금께서 스님을 국사(國師)로 책봉하고자 친서를 보내 세 번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달 19일 왕이 금과 은으로 장식한 가마를 준비해 봉은사(奉恩寺)로 행차하여 우리 해린(海鱗) 스님을 국사로 봉하였다.  

박종수 전 원주시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