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천사지에 있었던 서원마을. 1995년 법천사지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서원마을은 30여 호가 모여 사는 큰 마을이었다. 사진 왼쪽 가옥이 밀집된 지역이 법천사 금당과 강당이 있었던 중심 사역이다. 사진 왼쪽 산자락에 도동서원이 있었다.

부론면 법천리에는 서원(書院)마을이 있다. 한때 마을을 지켜주는 당목(堂木)이었던 마을 입구 느티나무 앞에는 지금도 서원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법천리'라는 행정지명은 고려시대 큰 사원 법천사에서 빌려온 이름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서원마을은 법천사가 사라지고 절터에 한집 두집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큰 마을을 이루었는데 옛 법천사 터에 들어선 마을 이름이다. 서원은 유교의 이념을 가르치고 유교의 이상을 실천한 덕망 높은 인물을 기리는 제향 공간이다. 천 년이 넘게 부처님을 모시고 불가의 법맥을 이어오던 절터가 유교 사상을 가르치는 서원마을로 불리다니 이상한 일이다.

법천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절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대체로 신라시대라고 하지만 짐작일 뿐이다. 법천사의 창건 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은 전하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발굴 조사로 밝혀진 절의 규모는 신라의 도읍지 경주에 있는 황룡사지나 백제의 왕도 공주에 있는 미륵사지와 견줄만하다. 신라와 백제를 대표하는 황룡사와 미륵사는 절의 창건은 물론 불상과 탑의 조성에 관련된 설화와 기록이 풍부하게 전해오고 있지만 그와 비슷한 규모인 법천사는 어떤 기록과 설화도 전하지 않는다.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법천사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직접 기록은 법천사에 세워진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유일하다. 그러나 지광국사현묘탑비는 고려의 고승 지광국사 해린 스님이 돌아가시고 세운 묘비로  해린 스님의 생애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법천사의 창건과 불상과 불탑의 조성, 사원의 증축 같은 사찰의 연혁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법천사가 처음 세워진 창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절이 사라진 시기는 허균이 남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저항 문학의 시작으로 알려진 손곡(蓀谷) 이달(李達 1539∼1612)은 법천사가 있었던 법천리 이웃 마을인 손곡리에 머물며 시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의 호 손곡(蓀谷)은 마을 이름 손곡에서 빌려 온 것인데, 마을 이름 손곡은 손위실(遜位室)에서 유래한다. 손위실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추방당하여 유배된 곳이다. 손위(遜位)는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의미이고, 손곡(蓀谷)의 손(蓀)은 창포 이름이다.

손곡(蓀谷)과 손위실(遜位실)의 한자가 다른 것은 천재 시인 이달이 호로 사용하면서 변용한 것이거나 같은 발음의 한자를 마을 이름으로 쓸 때 착오로 짐작된다. 이달이 원주에 머물 때 허균과 난설헌 남매는 허균에게 시를 배우러 원주를 찾았다. 허균이 생전에 쓴 글을 외손에게 남긴 문집이 성소부부고(惺所覆   藁)이다. 1609년 허균이 법천사를 방문하고 소회를 남긴 글, 유원주법천사기(遊原州法泉寺記)도 이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금년(1609년) 가을 휴가를 얻었다. 마침 지관 스님이 찾아와 '기축년(1589년)에 법천사에서 1년 머물렀다고 했다.' 스님과 함께 길을 나섰다. 난리(임진왜란)에 불타서 무너진 주춧돌과 함께 절터의 흔적이 토끼와 사슴이 다니는 길에 남아 있었다." 허균이 법천사를 방문한 것은 1609년이다. 허균이 방문했을 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로 전쟁 때 건물이 모두 불타고 주춧돌만 남은 폐허를 보았다.

그런데 동행했던 지관 스님은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 법천사에서 1년을 머물렀다고 하니 그때까지 법천사는 법등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시대 때까지 온전하게 법등을 이어오고 있었던 법천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폐사된 것은 임진왜란이 분명하다.

절이 사라진 폐허에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이다. 비록 건물은 불에 타 사라졌지만, 건물의 기단과 주춧돌 같은 풍부한 건축자재들이 절터에 남아 있어 다시 집을 짓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또 법천사가 위치한 지역은 흥원창과 멀지 않은 곳이니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수백 년 동안 큰 사원을 이루었던 대지와 잘 다듬어진 기단과 주춧돌 그리고 서울로 오가는 나들목이 근처에 있으니 누구라도 집을 짓고 싶은 곳이었다. 허균이 본 토끼와 사슴이 다니는 폐허가 된 너른 절터는 부처 없는 마을로 변했다.

임진왜란 이후 법천사터에 정착한 사람들은 나주정씨였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1625~1707)선생은 아버지가 관직에서 물러난 1649년 법천사터에 자리 잡았으니 임진왜란이 끝난 후 57년이다. 이 후 우담 선생의 후손들은 법천사 터에 대를 이어 살면서 나주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우담 선생이 돌아가시고 1721년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세우고 우담 선생을 제향하였다. 서원을 지은 기단과 주춧돌은 모두 법천사에 쓰였던 것이다. 천년 고찰 법천사터가 서원마을로 불린 까닭이다.  

박종수 전 원주시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