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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이 주는 부끄러움

밑둥은 다 말라서 텅텅 비어가는데 위쪽 나뭇가지는 새 생명을 피우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조건에서도 제 역할을 다하는 목단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신정은(우산동 주민)l승인202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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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단, 목단, 모란, 목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목단은 기품 있고 화려한 모양새로 꽃 중의 왕 '화중왕(化中王)'이란 수식어를 갖기도 합니다. 눈길을 사로잡는 색감과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꽃말로 과거에는 집집마다 정원을 장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아왔지만, 지금은 그 인기를 외래종에 내어주면서 접하기 어려운 꽃이 되었지요.

 몇 해 전 이사 온 주택에는 오래된 목단나무가 있었습니다. 성인 키를 훌쩍 넘기는 높이와 팔뚝만 한 나무기둥이 한 눈에도 고목임을 알 수 있었죠. 그럼에도 잘 다듬어진 수형과 소담한 꽃송이는 옛 주인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티가 났습니다. 귀한 모란꽃을 마당에서 키운다는 생각에 설레어 첫 해는 열심히 가지치기도 하고 정성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유칼립투스, 아몬드페페 등 다른 화분들을 들이면서 목단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점점 식어갔습니다. 봄이면 화려한 색감이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가끔씩은 촌스럽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난주 늦은 봄맞이 마당청소를 하다가 목단 나무에 새순이 돋은 것을 보았습니다. 푸릇하게 올라온 새순들 사이로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작년의 마른 꽃대도 눈에 띄었습니다. 마른 꽃대를 비집고도 새싹을 틔우는 것을 보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참 열심히 사는 모습에 감탄했죠.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밑둥을 정리하다가 발견했습니다. 뒤늦게 새순 옆 마른 꽃대를 톡톡 따고, 죽어서 새순이 나지 않는 가지도 자르다 밑둥까지 내려갔는데, 한 쪽 기둥이 말라 부서져가고 있었습니다. 마른 진흙처럼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베어 낼 생각으로 나뭇가지가 어디까지 연결됐는지 살펴보는데 그 끝에는 꽃망울이 맺혀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밑둥은 다 말라서 텅텅 비어가는데 위쪽 나뭇가지는 새 생명을 피우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조건에서도 제 역할을 하기 위해 꽃을 피우는 목단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봄꽃의 놀라운 성실함은 목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쭉 뻗은 가지마다 탐스러웠던 장미도 이제 보니 굵다란 중심 가지들은 다 죽고 가는 녀석들만 살아남아 땅으로 쓰러질 듯 휘어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도 봄을 준비하느라 가지 끝마다 도톰한 새싹을 품고 있었죠. 

 장미야말로 추위가 찾아오는 11월까지 가장 오랫동안 저에게 아름다운 꽃송이를 보여주는데 한참 잘못된 푸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겨우 살아남은 여린 가지 세 가닥을 끈으로 묶어 지지대를 세워주자 그나마 볼품 있는 모습을 갖췄습니다. 장미는 다음 날 작은 손길에도 보답하듯 숨겨왔던 잎사귀를 조금 더 드러내줬습니다. 

 목단과 장미가 극한(?)의 상황에서도 제 역할을 하는걸 보니 게으른 주인은 주변 환경과 상황을 탓하며 해야할 일들을 미뤘던 것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어쩌면 일을 미룰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봄이 오며 날도 풀리고 봄꽃도 저에게 부끄러움을 일깨워 줬으니 이제 더 이상의 핑계는 무리일 듯싶습니다. 우선 러닝화가 없어 미뤘던 걷기 운동에 슬리퍼라도 꿰어 신고 나가야겠습니다.
 


신정은(우산동 주민)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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