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간 지역사회 소외계층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아온 곽병은 밝음의원 원장은 지난 2월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대외적인 직책을 내려놨다. 지금껏 '남'을 위해 살아왔던 인생이라면 이제 남은 시간은 '내'가 주인이 되어 살고 싶다는 결심은 칠순을 앞두고서야 실천할 수 있었다. 지역사회 복지발전에 큰 역할을 해왔던 그가 떠난다는 건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다. 지금껏 그가 걸어왔던 발자취를 따르는 일은 이제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 됐다. 일평생 헌신하는 봉사자로서 늘 최선을 다한 그의 지난날을 돌아봤다.

그가 의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의아한 선택이었다. 서울 달동네에서 병원을 개업했던 그의 아버지를 찾아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진찰료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진료하는 아버지의 삶은 결코 동경의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로서 봉사자의 삶을 보고 자란 아들은 가족들의 만류에도 법대 대신 의대를 택했다. 

원주와의 인연은 국군병원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시작됐다. 군복무 중 가톨릭병원에서 의료봉사를 한 그는 제대 후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보육시설이나 요양시설로 꾸준한 봉사활동을 다녔다. 1989년 부부의원을 개업하면서 의료봉사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그의 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노숙인이나 독거노인 등 소외계층이 많았다.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주변 병원에 도움을 요청해 무료진료를 이어갔고, 이것이 바로 빈의자의사회의 시초가 됐다. 

최저빈곤층을 대상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빈의자의사회는 민간 의료진들이 모여 무료진료는 물론, 진료비 지원기금도 이들의 후원금으로 마련된다. 30여년 전 부부의원으로부터 시작된 소소한 의료협업은 이제 민관협력사업으로 대상자 발굴부터 의료기관 연계까지 탄탄한 지원체계를 갖춘 무형 자선종합병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곽 원장은 의료봉사를 위해 그들의 삶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병원을 찾기 꺼려하는 윤락여성들을 위해 희매촌에 월세방을 얻어 무료진료소를 운영했다. 빚에 허덕이며 따가운 편견속에 살아가는 그들이 병원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매주 수요일 병원 업무를 마치고 희매촌에서 무료 야간진료소를 운영하면서 어려운 이들의 처지와 삶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병원에서 만나는 취약계층에게는 비단 의료 복지만 시급한 건 아니었다. 의식주 등 복합적인 복지서비스가 필요했다. 때문에 그는 은퇴 후 요양시설을 운영하기 위해 마련했던 흥업면 대안리에 갈곳 없는 이들을 위한 주거시설인 갈거리사랑촌을 설립했다. 부모 없는 어린아이부터 장애인, 연로한 어르신까지 다양한 이들의 보금자리로 가정공동체를 이뤘다. 이곳 텃밭에서 키운 식재료로는 노숙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십시일반을 운영할 수 있었다. 

십시일반을 찾는 노숙인들의 사회복귀를 지원하고자 노숙인쉼터도 세웠다. 그들이 스스로 재기할 수 있도록 주거와 식사 제공은 물론, 금융 서비스까지 확대 지원하게 된다.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담보 없이 소액대출을 지원하는 갈거리은행의 행보는 주변의 우려를 살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걱정와 달리 상환률 90%를 넘기며 무담보 신용관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이후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 소액대출 외에도 재무관리, 금융교육 등 취약계층에게 금융 관련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곽 원장이 또 한번 사비를 털어 마련한 봉산동 할머니집은 노인 주거복지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수급비의 대부분을 월세로 내는 독거 노인들의 부담을 덜고자 마련한 공동주거 공간은 4~5명의 어르신들이 한 집에서 각자의 방을 갖고 생활한다. 이를 통해 주거비 부담을 줄이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안전망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

곽 원장은 지난 2013년 부부의원은 폐업했지만 밝음의원으로 자리를 옮겨 지난 9년 간 진료를 이어왔다. 차근차근 지역복지의 기반을 닦아온 그는 이제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롯이 본인을 위한 삶에 집중하게 됐다. 은퇴 후 독서와 서예, 여행 등 즐겨왔던 취미에 더욱 집중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의 은퇴에 아쉬움을 전하는 지역사회에 그는 "지금까지 실천해왔던 모든 일들은 나 혼자가 아닌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는 아내 임동란 씨와 수많은 자원봉사자, 복지시설 종사자 등 지역사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남아있는 분들이 원주에 대한 애정을 갖고 더 좋은 지역복지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