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업면 매지리 초은산방에 모인 스승과 제자들. 사진 왼쪽부터 한명희 블레싱홈 시설장, 노인만 씨, 스승 단초 심종보 선생.

서각도 손에 잡은지 불과 8개월여 만에 성과
한명희 시설장·단초 심종보 선생 조력 큰 힘

노인만(70) 씨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다. 어릴 때부터 언어청각장애가 있었고 왼쪽 눈은 실명했다. 다리도 불편해 주위 도움 없이 혼자 외출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한다. 수화와 구화(口話)로 주위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지만 최근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 불편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런 그가 지난해 연말 '제11회 대한민국각자대전'에서 당당히 특선과 입선을 수상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서각도(書刻刀)를 손에 잡은 지 불과 8개월 만에 거둔 성과다.

전통 조형예술인 서각은 음각, 양각, 음양각 등으로 삼차원의 공간표현 종합예술이다. 글만 써서 새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색도 칠하고 전각도 넣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나무가 주는 최고의 선물' '붓과 칼의 아름다운 조화'라고 불리듯 서예의 기본은 물론, 조각기술 등을 모두 갖추어야 제대로 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어서 도전하는 사람은 많아도 계속 이어가는 사람은 드물다.

장애인 그룹홈 '블레싱홈'에서 생활하는 노 씨가 서각에 입문한 것은 지난해 4월부터다. 그룹홈 내에서 '맥가이버'로 통하는 노 씨의 남다른 손재주를 눈여겨본 한명희(62) 시설장의 적극적인 권유가 노 씨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 시설장은 그 길로 노 씨와 함께 단초 심종보 선생의 매지리 작업실 '초은산방'을 찾았다. 노 씨에게 좋은 스승 밑에서 제대로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주위 지인들의 추천도 있었지만 장승·솟대·서각 명인인 심종보 선생은 한 시설장이 생각하기에도 최고의 스승이었다.

그때부터 매주 2회 '블레싱홈'이 있는 소초면 둔둔리에서 '초은산방'이 있는 흥업면 매지리까지 특별한 나들이가 시작됐다. 혼자 거동이 어려운 노 씨를 위한 동행이었지만 옆에서 돕던 한 시설장도 자연스럽게 함께 서각도를 잡았다. 노 씨는 금새 서각에 빠져들었다. 한 시설장은 "작업실에 가는 날을 달력에 메모까지 해놓고 기다릴 정도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며 "서각을 시작한 뒤 표정도 몰라보게 밝아졌다"고 말했다.

▲ 노 씨는 한명희 블레싱홈 시설장과 단초 심종보 선생의 격려와 가르침이 큰 힘이 됐다고 전했다. 사진 왼쪽부터 한명희 블레싱홈 시설장, 노인만 씨, 스승 단초 심종보 선생.

친남매같이 서로를 챙기며 서각에 몰두한 두 사람은 지난해 '제11회 대한민국각자대전'에서 나란히 입상 소식을 전했다. 두 작품씩 응모했는데 둘 모두 특선과 입선 각 한 점씩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노 씨는 필담으로 전한 소감에서 "내 생애에 이 같은 순간이 올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면서 "심종보 선생님과 한명희 시설장님께 감사하다"고 했다. 이어 "서각은 내 삶의 활력"이라고 밝힌 노 씨는 "언어청각장애로 타인의 보호 없이는 보편적인 삶을 살 수 없었는데, 한 시설장님 덕분에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갖게 됐다"면서 "주위 분들의 과분한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나 자신의 가능성을 열심히 가꾸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한 시설장은 모든 공을 스승 심종보 선생과 초은산방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에게 돌렸다. "말로는 장애인을 위하는 것 같아도 대부분 피하기 마련"이라며 "처음에는 함께 공부하는 분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는데 스스럼없이 대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마음을 전했다.

이들을 지도한 심종보 선생은 "노 씨의 열정과 노력을 보면서 내가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것이 더 많다"고 했다. 한 시설장과 노 씨를 "인간적인 면모가 훌륭한 분들"이라고 평한 선생은 "노 씨의 경우 남들보다 5~6회 이상 반복교육을 받는 어려움 속에서도 본인이 하고자 하는 노력이 뒷받침됐기에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한 시설장은 노 씨와 함께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오는 7월 학성갤러리리에서 노 씨의 첫 번째 개인전을 열어줄 계획이다. 10월에는 창작스튜디오에서 자신의 개인전을 열고 노 씨를 비롯해 블레싱홈에서 함께 생활하는 장애인들의 작품도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한 시설장은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분들이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며 "이분들이 행복하면 그 것으로 족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