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이른 봄 대학 신입생 환영회 날이었다. 성이 최씨인지라 60여 명 신입생 중 거의 마지막에야 자기소개를 하게 되었다. "저는 강원도 원주에서 온 최혁진입니다" 갑자기 곳곳에서 '와' 하는 환호성이 일더니 한 선배가 말했다. "그 먼 산골짜기에서 서울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순간 당혹감에 살짝 어지럼증마저 느꼈다. 앞서 소개한 동료들은 목포, 진주, 영덕 등 원주보다 훨씬 먼 곳에서 왔다, 하지만 강원도라는 말 한마디에 정서적으로는 가장 멀고 외진 곳 출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공부를 마치면 고향 강원도 원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던 것이 바로 그때였다. 서울보다 인구도 턱없이 적고 폼 나는 고층 빌딩 숲도 없지만 소상공인 등 서민경제가 아주 튼튼해서 누구나 고르게 잘 사는 도시는 꿈꿔 볼 수 있으리라. 또한 교육, 문화, 의료, 복지 등 삶의 질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인 도시, 그런 원주의 미래상은 도전해볼 만 하다고 자신했다.

 졸업 이후 원주에 돌아와 의료협동조합 설립과 주치의 시범사업, 재래시장 살리기, 친환경 급식, 주거복지, 좋은 일자리 만들기에 전념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일하는 틈틈이 원주와 비슷한 규모와 환경에도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명품 도시들을 수없이 찾아다녔다. 그 긴 여정에서 발견한 것은 원주가 그들 못지않은 잠재력과 자원을 지닌 도시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오늘날 원주는 혁신도시와 기업도시로 전과는 비교할 수없이 풍부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한번 눈을 씻고 찾아보자. 전 세계에서 원주만한 지방 도시들 가운데 각 분야를 대표하는 최고의 국가기관을 13개나 보유한 도시는 과연 몇 개나 되는가. 각각의 기관들은 대한민국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명성이 높은 곳들이다. 건강보험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은 국제적인 수준이다. 당연히 건강보험 정책을 총괄하는 건보공단과 심사평가원의 평가 관리체계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그뿐인가. 원주에는 대학도 무려 5개나 있다. 수만 명의 훌륭한 인적 자원과 여러 분야의 연구개발 인프라를 지닌 도시라는 의미이다. 고용과 소비 측면에서도 이들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모름지기 상당한 규모일 것이다. 국제적으로 이 정도의 강력한 지적 자원을 보유한 지방 도시는 손꼽을 정도이다.

 여기에 더하여 주목할 것이 있다. 원주가 문화적 다양성과 개방성, 생태적인 감수성과 높은 연대의식 및 공동체성을 지닌 도시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흥원창이 있었던 탓에 각 지역의 물산과 사람들이 원주를 넘나들면서 변화에 대한 수용성이 높고 상업적인 감각도 탁월하며 개방적인 문화를 지니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님과 장일순 선생님의 사상과 실천, 협동조합 운동의 전통,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풍부한 역사성을 이어받아 생태적이고 협동적인 인식도 높은 수준이다. 오늘날 기후 위기로 전 세계가 ESG를 중시하고 탈탄소 사회로의 급속한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이 대전환기에 원주가 축적해온 생태적이고 연대적인 감수성은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가.

 문제는 이 최상의 자원들이 제각기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비전과 리더십이 부재한 탓이다. 글로벌 수준의 국가기관들의 핵심 역량이 원주의 브랜드가 되지 못하고 있다. 건보공단과 심평원이 있음에도 한국의 건강보험 및 평가체계를 배우기 위해 전 세계인들이 찾아오는 도시가 되지 못했다. 한국관광공사는 있지만 이 분야의 세계적 수준의 포럼이나 박람회는 원주에서 열리지 않는다. 보훈공단이 있지만 최상의 보훈 인프라를 갖춘 보훈도시가 된 것도 아니다. 각 분야 최고의 국가기관이 원주에 있다면 그 각 분야는 원주를 상징하는 대표 상품이 되어야 한다. 

 각각의 공공기관들과 연계한 글로벌 포럼과 박람회가 수시로 열리고, 원주의 청소년들은 세계적인 석학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며 자라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저녁마다 구도심 문화의 거리는 각 나라의 언어로 대화하며 치맥을 즐기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원주가 지닌 생태적 감수성과 각 대학이 보유한 인적, 지적 인프라들을 다양하게 융합하여, 탈탄소 시대를 선도하는 신산업 기반 구축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 해가 바뀌면 음지가 양지가 되듯이 과거 탄소기반 산업화에서는 후발주자였지만 다가오는 그린 뉴딜 시대에는 원주가 미래 산업을 선도하는 도시로 발전해 갈 수도 있다. 여기에 공공의 자원까지 결합되면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

 신입생 환영회가 있던 그날 이후 나는 늘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불평등과 격차가 없이 고르게 잘 사는 따듯한 공동체, 전 세계인이 찾아오는 매력 있는 도시 원주를 꿈꾸었다. 그것은 결코 헛된 꿈이 아니다. 우리의 선택과 도전의 문제이다.

최혁진 전 청와대 경제수석실 비서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