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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되돌아보며 또 다른 미래 설계

원주영상미디어센터·가톨릭종합복지관 어르신 자서전 수업 수강생 자서전 모음1 원주투데이l승인2019.12.16l수정2020.01.04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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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영상미디어센터와 원주가톨릭종합복지관이 '내 인생, 우리의 역사'를 타이틀로 지난 8월부터 5개월간 진행한 '어르신 자서전 수업' 수료자 여섯 분의 글을 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본문 글은 이들의 자서전 모음집인 '지금, 즐거운 인생'에서 발췌, 재구성했습니다.  <편집자 주>


지금은, 희망이 있습니다

허옥분(68, 태장동)
 
저는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 여천리 여울목 작은 산골짜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뒤란으로 돌아가면 사과와 배가 땅에 떨어져 있었고, 집 앞 텃밭으로 나가 앵두를 따 먹던 생각도 납니다. 단옷날이면 집 앞 커다란 밤나무에 걸린 그네를 타던 많은 사람도 생각납니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어린 시절

4살 때 홍역을 앓던 중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았습니다. 10살이 되든 해, 눈물이 줄줄 흐르고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눈의 병이 잠자고 있다가 발병하여 잘 보이는 눈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5년 동안을 암흑 속에 갇혀 살았습니다. 신발을 찾으려면 손으로 신발 모양을 만져보고 난 후에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화장실도 푸세식이었기에 3살 아래인 여동생이 이쪽저쪽 발을 놓아 주어야만 했습니다. 밥을 먹을 때는 어머니가 여러 반찬을 넣어 비벼주면 밥그릇을 손으로 잡고 먹곤 했습니다. 전차를 타고 어머니와 함께 을지로 6가에 있는 국립의료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하나도 보이지 않는 나를 데리고 병원을 오가는 어머니는 무척이나 힘들어했습니다.

1년 정도 치료를 받은 후, 의사 선생님은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했다며 굳이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작은 빛이라도 보면 빨리 병원으로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5년의 세월을 보내고 어느 날, 여동생이 주황색 원피스를 입고 햇빛에 서 있는데 그 색깔이 반사되어 횃대 보에 비쳐 내가 잡으러 가는 것을 어머니께서 보시고 깜짝 놀라며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그때 제 나이 16살, 안경을 쓰면 신문에 있는 글씨까지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설레고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행복했던 신혼, 그리고 원주살이

제 나이 27살 되든 해 한 살 연하인 지금의 남편과 중매 결혼했습니다. 아스팔트 위에서만 살던 저는 시골 생활이 너무 좋았습니다. 전원 풍경도 아름답고 공기도 좋았습니다. 집 앞 개울에 빨래를 흔들어 빨면 너무 신기했습니다.

큰 가마솥에 감자를 넣고 불을 때서 하는 밥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남편이 잡아 온 가재를 냄비에 넣고 화롯불에 볶았는데 빨갛게 익은 가재는 지금 생각해도 먹어보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가로등이 없는 밤에 남편은 저를 업고 번개같이 캄캄한 길을 잘도 다녔습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습니다.

1986년 3월 8일, 원주에서 우리 부부는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자동차 수리업을 하고 있습니다. 원주에 이사 온 후부터는 좋은 일이 헤아릴 수 없게 이어졌습니다. 아이들 셋을 무사히 대학에 보내고, 취직도 다 했습니다. 큰딸은 시험관아기 시술사, 작은딸은 간호사, 아들은 사회복지사입니다. 손자가 3명이고 손녀가 1명 있는데, 2명을 내 손으로 키웠습니다. 손주들이 얼마나 신기하고 대견스러운지 저는 무척 행복합니다.

내 생애 잊지 못할 가을

2018년 7월 16일, 안면 마비가 제게 찾아왔습니다. 1년 넘게 치료하고 있지만, 정상으로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는 얼굴입니다. 안면 마비가 지속되면서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쉼 없이 앞으로 달려가기만 했던 내 인생을 잠시 멈추어 설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건 나의 건강입니다. 빨리빨리 나아지지 않는 제 얼굴이 참으로 답답합니다. 그러나 더 큰 병이 오지 않은 것을 감사하며 즐겁게 지내려고 합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자서전이라는 단어는 부끄럽습니다. 저는 그저 나의 삶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이번 가을은 나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는 가을이었습니다. 내 생에 잊지 못할 가을이 될 것 같습니다.


웃으며 떠나고저, 무궁화 지듯

김화존(81, 무위당독서회 회원)

1939년,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미학리. 70여 호, 자그마한 마을이다. 11남매 중 막둥이였다. 가난하던 때여서 칡가루 죽을 먹기도 했지만, 몹시 배를 곯았던 기억은 없다. 내 삶은 고향과 타향 둘로 나눌 수 있고 살던 곳은 세 곳 부산과 울산, 춘천이다.


새로운 삶을 배운 타향살이

부산살이 6년 반 동안은 새로운 삶을 배웠다. 채소, 솜사탕, 엿을 팔기도 하며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다. 도매 시장에서 경매가 끝난 채소를 받아서 리어카에 싣고 주택가 골목을 돌며 팔았다. 세상에 나와 처음 해보는 장사요, 숫기마저 없었으니 등에서 땀이 났다. '배추 사세요!' 하는 목소리는 밖으로 나오기보다 도로 들어갔다.

남는 것으로 보면 솜사탕은 할만한 장사였다. 적은 밑천에 할 수 있고, 싸게 먹혔다. 자전거를 세우고, 빛깔 곱고 구름 뭉치 같은 솜사탕을 만들면 아이들이 사 갔다. 그러나 오래 하지 못했다. 팔릴만한 자리는 이미 다른 장수가 있었다. 그때 흔하던 쪽자나 국화빵 같은 것인데 거의 나이가 많았다. 종류가 달라서 같이 해도 괜찮지만 미안하고 눈치가 보였다. 이처럼 될 만한 자리를 비켜 다녀야만 했다. 엿 장사는 솜사탕 장사보다 경쟁은 덜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다 좋아해서다.

눈물겨운 일은 아직 학교에 가지 않는 두 아이를 리어카에 태우고 다닌 일이다. 멀리 갈 때는 리어카 안에서 어린 남매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자리 잡으면 나와서 놀았다. '마음껏 자유롭게 놀아야 할 아이들이 못난 아비 만나 저리 힘들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내 인생의 가장 좋은 벗, 책

울산은 1976년 6월 말에 갔다. 7월부터 삼미종합특수강에서 일하였다. 부산에 있을 때 동국제강에서 익힌 천정기중기 운전공이다. 부산에서 2만 원이던 월급이 4만 원, 일터 환경도 훨씬 깨끗하고 조용했다. 견습공 딱지를 떼고 정식 일꾼이 된 것이다.

울산 20여 년은 젊은 날을 보람 있게 살았던 시절이었다. 아픔도 있었지만 하고 싶었던 일을 하였다. '삼미독서회'를 만들어 좋아하던 책을 읽었고, 읽은 책을 적기 시작한 게 1988년이다. 2012년까지 24년 동안 1천154권, 한 해 평균 48권씩 읽었다. 이때 가장  많이 읽었다. 어느 해인가는 86권을 읽었다.

책은 오늘의 나를 나답게 한 가장 중요한 만남 중 하나다. 중학교 때 책을 만났고, 고기가 물을 만나듯 날마다 나와 함께한 참으로 좋은 동무다. 때로는 스승이고, 힘들고 지쳤을 때 늘 곁을 지켜주었다. 종일 나 혼자 있어도 심심하거나 시간이 남아 애먹지 않는다. 나이 들어도 그냥 늙어가는 게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하는, 여름날 시원한 샘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2015년 77세였을 때, 98일간 여행을 했다. 목적은 자서전을 쓸 자료를 찾는 것, 그리고 마무리였다. 내가 살았던 곳, 발길이 머물던 곳을 더듬어 추억을 되새기고 생각나는 것이나 느낌을 적었다. 고마웠던 분들은 찾아가 인사하고, 내가 잘못하였거나 섭섭하게 한 분들은 찾아가서 사과했다. 그러나 뜻과 같지 않았다. 많은 이가 이미 떠나버렸다. 너무 늦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써 두었다. 암 같은 중한 병이 들면 연명치료를 하지 말 것, 무덤을 만들지 말 것, 상복은 평소 입던 옷을, 내 주검 옷도 내가 입던 한복 중 여름이면 모시옷, 겨울이면 겨울 한복을 입힐 것을 부탁하였다. 시신은 춘천 한림대학교 의과대학에 실험에 쓰도록 주라고 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나눠줄 것도 없다. 참으로 홀가분하다. 해걸음 앞에 선 지금,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싱싱하고 깔끔하게 진 '무궁화꽃'처럼, 내 마지막 모습이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늘 중심에서, 열정으로 살아낸 세월

 

채복순(73, 단계동)

1947년 음력 2월 2일 강원도 원성군 흥업면 무실리 송삼동에서 3남 1녀로 태어났다.
 

첫 발령지 홍천, 벽지 아이들과 함께

홍천읍에서 내면 가는 버스를 타고 발령장을 들고 갔다. 3시간여를 덜컹거리는 차 속에서 먼지를 가르고 구불구불 아슬아슬 고개를 넘고 다리를 건너 도착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속의 원당초등학교에서 나는 당당히 교사의 길을 시작했다.
코흘리개 1학년의 담임을 맡았는데 벽지의 문화 혜택을 못 본 아이들이었다. 흙 속에 묻힌 진주처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예쁜 얼굴들이었지만, 겨울엔 목욕을 못 해 손등이 더덕더덕 더덕 껍질처럼 두꺼웠다.

추위에 장갑 없이 다니다 보니 살이 터서 피가 나오는 학생, 코가 나와도 닦을 줄 모르는 학생, 양말이 없어 맨발로 또는 구멍 난 양말로 다니는 학생이 다반사였다. 머리는 감지를 못해 머리빗이 내려가질 않았고, 옷에서는 아빠들이 피는 담배 연기에 냄새가 배어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용의 검사와 머릿니 조사는 필수 보고사항이었다. 이를 잡는다고 DDT를 머리와 옷에 뿌리고 와 옆에 가면 질식할 정도였던 학생도 있었다. 그때 그 학생들, 내 사랑하는 첫 만남의 제자들. 지금쯤 60세 전후의 노년에 들어섰겠지···.

주말 부부로 사북에서 5년

당시 사북은 전국 제일의 석탄 매장지였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퇴근해 귀가하면 창틈으로 들어온 탄가루로 하얀 걸레는 금방 까맣게 변했다. 학생들 위생 상태는, 귓속엔 탄가루가 그냥 남아있기도 했고 손톱 끝은 까만 매니큐어 바른 듯했으며 입은 옷도 세탁하지 못해 냄새가 풍겼다.

우린 5년간 주말 부부였다. 남편은 아들딸과 원주역 열차 도착 시간대에 마중을 나와 반겨주었지만, 난 가족들과 하룻밤을 보내면 다음 날 저녁엔 다시 밤 열차로 사북을 향해 달려야 했다. 가족들과 헤어짐이 가슴 아파 보이지 않는 열차 속에서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남편은 아내의 몫까지 해내는 1인 2역의 남편이었다. 남매의 고등학교 점심 도시락 준비며, 야간 수업 간식이며, 동반 귀가해주는 것이며… 표창장을 주고도 남을 만큼 엄마를 대신한 훌륭한 외조였다고 생각한다.

사북에서의 저녁 시간은 나만의 시간이었다. 난 나의 연찬 발전을 위해 서예로, 판화로, 연구로, 날마다 스펙을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붓글씨 지도를 받아 전시회도 가졌으며 동판 판화도 익혀 작품을 완성하였고 아동 미술 지도와 과학탐구 지도의 실적도 쌓아 교육장, 도지사, 교육부장관상 등 많은 수상을 하였다. 이때 150여 명을 대표하는 정선군 여교사 협의회장을 역임하기도 하며 바쁜 시간과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홍천군을 시작으로 원성군, 원주시, 정선군, 다시 원주시로, 또 준교사로 시작하여 2급 정교사, 1급 정교사를 거치며 30년의 초등교육 교직 생활을 2000년에 마감했다. 직후부터 2013년까지는 시모님이 운영하는 어린이집 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화려한 백수, 참 좋은 지금의 나

퇴직 후 한동안 난 무엇을 할까 고민에 빠졌다. 지금은 월요일엔 댄스 체조, 화요일엔 자서전 쓰기, 수요일엔 안마받기, 목요일엔 붓글씨, 금요일은 쉬고, 주일엔 교회로…. 남는 시간엔 아침저녁으로 탁구를 치며 여러 모임 활동을 한다. 화려한 백수지만 나는 지금 누구보다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난 아무런 구애받지 않는 지금의 내가 참 좋다.


원주투데이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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