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가 흐려 눈을 몇 번이나 껌뻑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산은 산새를 조롱에 가두지 않고, 자연도 그 품에 사는 사람을 가두지 않건만, 오늘은 미세먼지가 뿌연 장막으로 우리를 가두었다. 서울을 벗어나면 미세먼지도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았는데, 내 숨 쉬는 땅 원주가 서울의 턱밑이며, 비좁은 한반도 중심에 놓여있는 곳임을 새삼 깨우쳐주는 날씨였다.
 

 팔년 전, 오랜 삶의 터전인 서울을 필사적으로 벗어나 치악산 그늘에 안겨들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안 것 같았다. 나의 원주 입성은 성공한 셈이었다. 여기가 무릉도원은 아니지만 나는 이곳에서 마음이 시끄럽지 않으며 하루하루가 느긋하고 아주 편안하다. 통계적으로 자연재해가 별로 없는 땅이라서 그럴까, 여기 사는 사람들도 모나지 않고 거칠지 않다. 만날수록 따뜻한 속정을 느끼게 하여 그 어느 곳에서 살 때보다 알콩달콩 재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이 원주 땅에 알 수 없는 상서로운 기운이 주재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무위당 선생, 박경리 선생, 그분들을 큰 나무로 키운 어떤 강렬한 정신적 에너지가 있는 것 같다. 그 에너지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혈관으로, 세포로 스며들어 삶을 이끄는 기분이 든다. 주저하지 말라, 소신을 가지고 행동하라, 태워라 한번 뿐인 생이 아니던가.

 내 안에서 어떤 열기가 나를 부추기는 것 같다. 여기, 원주 치악산 품에 안긴 후, 가슴이 자꾸 뜨거워지는 까닭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면서 새삼 더 알게 된 이치가 있다. 나를 가둔 것은 나였으며, 날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가벼워지면 자유로워지고, 뜨거워지면 삶도 무료하지가 않다.  
 

 나이 한 살씩 먹는 일은, 나를 옥죄고 짓누르는 사슬을 하나씩 푸는 일이다. 쏜살처럼 해가 바뀌고 나이테 하나씩 늘어나는 일이 나쁘지 않다. 이 나이만큼 살지 못했더라면 요즈음 느끼는 이만큼의 자유로움도 얻지 못했을 것 같다. 내가 헤엄쳐 온 세월이라는 강물이 물고기를 키우듯 나를 키워내고 또 자유로움도 맛보게 해주었음을 안다.
 

 이제 며칠 있으면, 공식적으로 한 살을 더 먹는 설날이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가 지나갈 뿐인데, 한 살씩 더 만들어지는 '해돌이' 즉 둥근 나이테는 내 안 어디에 새겨지는지 어린 시절엔 무척 궁금했었다.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거대한 손길이 지구 밖 어디에 숨어있는 줄 알았으며, 시계 속에도 작은 사람이 숨어있는 줄 알았다. 상상도 컸고 궁금한 것이 많았던 날들을 지나 어른이 되었다.
 

 이번 기해년의 설날은, 절기상으로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일이 바로 그 전날(2월 4일)이니, 그야말로 달과 태양의 주기로도 맞아떨어지는 새해 첫날이 함께 오는 것이다. 육십 년 만에 찾아오는 황금돼지해란다. 입춘첩을 굳이 써 붙이지 아니했어도 어떤 무엇으로도 아프지 않게 생명의 기운을 집집마다 듬뿍듬뿍 안겨주었으면 한다. 저마다 가슴에 드리우고 사는, 저 미세먼지 장막 같은 그늘을 다 거두어주었으면 좋겠다.

문혜영 시인.수필가 국정교과서 수록작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