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상경…60세에 나홀로 미국 유학

지난 6월 시립중앙도서관 전시실에서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끝없이 이어진 피난행렬과 어두운 방안에서 울고 있는 고아소년, 전쟁의 악몽에 시달리는 여인의 모습 등 굵은 붓 터치로 표현된 12점의 작품은 '다시는 전쟁의 아픔과 비극이 이 땅에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무겁게 관람객들에게 전달했다. 

이 전시회를 마련한 주인공은 서양화가 현정화(74) 씨. 미국 유학시절 뉴욕 맨하튼과 귀국 후 서울 인사동에서 같은 주제로 개인전을 열어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20대에 떠난 고향 원주로 돌아와 갖는 첫 전시회라는 점에서 현 씨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유년기에 경험한 6·25전쟁의 참상이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아 화폭 속으로 옮겼다는 그녀는 자신이 그린 그림만큼이나 평범치 않은 삶을 살아 온 인물이다.

1945년생인 그녀의 고향은 당시 원성군에 속해있던 신림이다.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장녀가 그녀가 세상에 나오면서 부여받은 책임감이자 몫이었다. 당시 농촌에서 태어난 맏이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그녀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학업을 접어야 했다. 잠시 비인가 중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그 마저도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집안일을 돕는 틈틈이 헌책방에서 손에 잡히는 책을 읽어가며, 지식에 대한 허기를 달랬지만 책을 통해 꿈꾸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현실은 더 초라하고 암담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이 싫어 스무살이 되던 해에는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고 단짝친구와 함께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정해진 직업이나 거처도 없이 한번 부딪혀 보자는 생각으로 저지른 일탈이었지만 그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는 꼬박 50여 년이 걸렸다.  

"20대에 상경하면서 삶의 목표 정한 뒤
 한눈팔지 않고 꾸준히 한길만 달려와"

서울살이 역시 녹록치 않았다. 함께 집을 나선 친구는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녀는 공부를 하겠다는 목표 하나로 온갖 굳은 일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한참 후 소식을 접한 부모님이 그녀를 찾아 서울로 달려왔지만 이미 확고해진 그녀의 결심을 꺾진 못했다. 당시 "도둑질과 술집 등을 제외하고 안 해본 일이 없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서울생활이 조금씩 적응되자 어린시절부터 좋아했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요화가회와 한국풍경화가회에 몸담고 아마추어 작가로 활동했다. 삼십 년 동안 일한 직장에서 은퇴한 뒤에는 체계적으로 그림을 배우자는 생각으로 미술학원에서 입시미술을 공부했다. 미대 진학을 목표로 낮에는 화실에서, 밤에는 고시원에서 책과 씨름했다.

3년간의 노력 끝에 남서울대 환경조형학과에 합격하며 늦깎이 대학생이 됐지만 이번에는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대미술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10여 년간 청약부금을 부어 마련한 아파트 전세금을 챙겨 나홀로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한국나이로 60세. 말도 통하지 않을 때였다.

2003년 미국 테네시주 칼슨 뉴먼대학교에서 어학연수생으로 시작해 2007년 봄학기 뉴욕 맨하튼 헌터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영어실력을 키우기 위해 한국인들이 없는 동네에 거처를 마련하고 한인교회와 한국식당 대신 현지인들만 다니는 교회와 식당만 찾아다니는 등 눈물겨운 노력 끝에 얻은 결실이다.

남보다 늦은 2012년 봄에야 졸업장을 받아들었지만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1년간 현지 갤러리에서 인턴쉽으로 큐레이터 경력도 쌓았고, 2013년 뉴욕 맨하튼 스페이스 웸 아트 갤러리에서 가진 졸업개인전은 현지 언론에서도 주목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 씨는 자신이 60대의 나이에도 미국 유학에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준비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20대에 상경하면서 삶의 목표를 정한 뒤 한눈팔지 않고 꾸준히 목표를 향해 한 길만 달려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명예와 돈을 얻기 위해 분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일하라"는 영국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William Barcly)의 말을 평소 좋아한다는 현 씨는 "목적을 위해 수를 쓰려고 하거나 욕심을 내면 스스로가 고통스럽고 자신의 삶이 힘들어진다"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성실하고 정직하게 노력하면서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