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모든 자잘한 것에도 따뜻한 애정과 연민 가득한 호흡을 불어넣는 러시아 최고의 극작가인 안톤 체홉(Anton Chekhov 1860~1904)의 <세 자매: Three Sisters>가 '극단 노뜰'의 원영오 연출가의 밀도 높은 재구성으로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했다. 원작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40년 후로 설정된 이 작품에서는 세 자매와 군인, 남자로 압축되어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지방은 과감하게 제거하고 담백함만 남겼다.
 

 인물들이 끊임없이 동경하는 '모스크바'는 그들 각각의 욕망의 기표이자 암울하고 덧없이 계속되는 지루한 삶에 대한 탈출구를 상징한다. 체홉의 원작에서 느껴지는 삶의 철학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라는 아련한 메시지를 몽환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극 언어로 한껏 팽창시켜서 터뜨리는 맛을 세련되게 극화해 내었다.

 여기에 곁들여진 음악은 존재의 심연을 툭 툭 건드린다. 거세게 휘몰아가지 않고 그저 무심한 듯 냉담한 듯 스치듯 스며든다. 팀 험프리(Tim Humphrey)와 매들린 플린(Madeleine Flynn)이 무대에서 직접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형식은 얼핏 일본의 노오극(Noh Drama)을 연상케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음조가 꽤 동양적인 정서를 자아내면서 깊은 심연에 작은 스크래치를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효과를 준다.
 

 꿈과 사랑, 삶과 죽음, 기억과 추억, 현실과 이상이라는 주제의 변주가 반복되면서 마침내 한 줄기 빛으로 형상화된 '구원'이라는 귀결점에 도달한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자신의 삶을 견뎌내어야 하고 비루한 삶에도 의미는 숨어 있는 법. 가느다란 한 가닥의 희망을 찾아내어야 하고, 찾지 못한다면 만들기라도 해서 자신의 삶을 견뎌나가야 하는 것이다. 음습한 날씨가 계속될수록 봄날의 따뜻했던 모스크바를 그리워하지만 환멸로 가득 찬 현실에 주저앉아 한 줄기 희망만 부여잡은 채 그들의 삶은 계속되고 있고 우리의 삶도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첫째 자매를 연기한 임소영은 뒷모습조차도 처연하게 연기해내는 내공 깊은 배우다. 배우는 뒷모습으로도 많은 말을 해 주는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둘째 자매를 연기한 이은아는 목소리의 결을 마치 거문고 활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아는 배우다. 그녀가 내는 톤의 굵기는 때론 광기로 얼룩진 섬뜩함 마저 만들어준다. 셋째 자매를 연기한 조하늘 배우는 두 언니들이 가진 무거움을 조금은 덜어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볍기만 할 수 없는 존재의 균형감각을 잘 살려내었다.

 군인을 연기한 김희준과 남자를 연기한 윤상돈은 모스크바를 동경하는 이상주의자와 낯선 곳이 주는 불편함과 두려움으로 현실을 지탱하려는 자가 마치 줄다리기 줄을 같은 무게로 팽팽히 잡아당기고 있는 갈등의 리듬을 탁월하게 표현해 주었다.
 

 그리고 간간이 사용하는 러시아어 대사에서도 러시아어를 모르기에 더 와 닿는 의미의 파장을 던져준 원영오 연출가는 참으로 영리하고 발칙한 상상력을 가진 것 같다. "달빛이 얼마나 밝은지 말하지 말라, 차라리 깨진 유리조각에 비친 달을 보여 달라"는 체홉의 주문대로 그는 관객들에게 희미한 달빛 한 조각을 가까이 끌어당겨 주었다.

김미경 연극평론가 상지대 외래교수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