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1987' 영화를 보았다. 87년 나는 춘천에 있는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였다. 연초부터 박종철 군의 사망사건, 이어진 고문조작 보도 등에도 불구하고 집회에 참여하는 학생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교문을 나서서 시민들에게 고문 정권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데모를 벌였지만 번번이 좌절됐고 "데모를 하도 해서 장사를 해 먹을 수 없다"는 상인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냐"며 도서관으로 향하는 학우들의 냉소에 절망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의 불의에 눈감고 오직 자신의 이익과 안위만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나 87년 6월. 상인들은 경찰에 쫓겨 달아나는 학생들을 셔터를 내려 숨겨주고, 도서관에만 있던 학생들이 함께 스크럼을 짜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목이 터져라 외쳤고 넥타이를 맨 퇴근 길 직장인들이 거리에서 박수를 치며 응원하였다. 이런 87년 6월의 경험은 내가 지금껏 역사의 발전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가 만들어지고, 내가 사는 지역의 대표를 주민들의 손으로 직접 뽑는 풀뿌리 민주주의 제도인 지방자치제가 부활하였다. 87년 당시 내 나이만큼 커버린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며 우리가 간절히 원하던 세상은 만들어졌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방자치 20여년이 넘게 흘렀지만 단체장과 의원을 주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 것을 제외하면 관선시대나 민선시대나 행정 시스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저출산, 양극화, 지역격차, 정치갈등, 복지, 청년고용 등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함은 물론 해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주권대리인인 대통령과 국회의원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은 주권자인 국민의 뜻과 다른 행태를 보여도 주권 대리인을 제대로 통제할 수가 없다. 과도한 권력 집중은 국민의 안전보다 기득권 집단의 이해가 우선됨으로써 사회갈등이 증폭되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실정이 다르고 주민들의 요구가 다른 만큼 지역 실정에 맞는 입법, 재정, 조직이 가능해야 지역자생력을 갖고 실질적인 자치를 실현할 수 있으나 현재의 지방자치제도는 반쪽자리 제도에 불과하다.
 

 촛불시민의 힘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을 약속하였다. 오는 6월 지방선거에 지방분권 개헌을 실시하겠다고 한다. 지방자치제도의 핵심은 분권과 자치에 있다. 중앙정부에 집중된 권력을 지역으로 나누고, 지방정부에 집중된 권력을 지역주민에게 나누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권만큼 주민자치의 역량이 중요하다.
 

 중앙정부로부터 나누어진 권력이 지방정부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면 마찬가지로 주권자인 주민의 요구와 반하는 권력집행을 견제하고 통제하기가 어렵고 주민의 행복감과 만족감은 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지방자치 행정에 '참여'를 넘어 '주체'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주민의 의사에 반하는 불의한 권력을 키우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에 나섰던 마음으로, '적폐청산'을 외치며 촛불을 들었던 간절함으로 바로 이곳에 사는 우리들의 삶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내 삶을 바꾸는 자치분권'을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