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아(왼쪽)씨와 멘토가 되어 준 한영남 씨.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지난 1일 원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진행된 장애인 부부 결혼식에서 조은아(28) 씨는 단아한 음성으로 김소월 시인의 '초혼'을 낭독하며 장애인 부부의 결혼을 축하했다. 시(詩)가 결혼식장에 울려 퍼지자 하객들은 숙연해졌다. 2년 전만 해도 부끄러움이 많고 내성적이던 조 씨가 늠름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섰기 때문. 조 씨는 시각장애 3급을 지녔다.

초등학생 시절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착용했는데도 나아지지 않았고, 야맹증 증상도 나타났다. 고등학교 때 신체검사에서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선천성 장애로 사물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큰 절망에 빠졌다.

20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조 씨는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학업을 지속했다. 성우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꿈을 포기한 채 대학에 진학해 사회복지사가 됐다. 조 씨는 "나에게 세상은 지난 몇 년간의 모습이 전부였고, 점점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세상을 제대로 볼 순 없지만 세상 속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에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2011년 원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직원 채용 공고가 나자 입사원서를 넣었다. 첫 번째 면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지만 포기하지 않고 재응시해 입사하게 됐다. 복지관 생활은 생소했다. 원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 전정란 팀장은 "입사초기 은아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됐고, 무엇보다 얼마 만큼 버텨줄 지 미지수였다"고 말했다.

복지관 개관 초기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한영남(53) 씨가 멘토가 됐다. 장애를 지녔고 사회생활을 해 본적이 없던 조 씨에게 한 씨는 회사 선배이자 동료, 친구가 돼 주었다. 조 씨가 할 수 있는 업무 범위 안에서 스스로 일처리를 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봤다.

한 씨는 "은아와 같은 딸이 있고 당시 봉사자였기에 같이 배우자는 심정으로 죽마고우가 됐다"고 말했다. 조 씨는 "장애가 없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고, 그럴 때마다 위로를 건네준 사람이 한영남 선생님이었다"고 말했다. 조 씨는 현재 복지관에서 성인장애인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다.

고비도 있었다. 조 씨가 심적인 부담으로 퇴사를 이야기 한 것. 그러나 한 씨의 오랜 설득으로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한 씨는 "2년 전보다 훨씬 웃음이 많고 늠름해진 은아를 볼 때마다 뿌듯하면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조 씨는 복지관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성우의 꿈은 놓치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