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엔 정월 대보름 행사차 호저면 고산리를 찾았다. 우리 상지대학교 인문사회대학과 1교 1촌 자매 결연을 맺은 지도 벌써 5년째에 접어든다. 학생들과 여름·가을 농활 때 방문하고, 가끔씩  고산리 위쪽 펜션에서 외국인 교수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노인 어른들께서 학교도 방문하시면서 이제 고산리 주민들과는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 며칠 전부터 이장님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난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너른 들길을 씽씽 달려 들어선 마을 어귀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윗마을 고니골 뽕잎 농장을 운영하는 조영준 사장님은 팔에 완장을 차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교통 정리를 하고 있었고 부녀회장님을 비롯한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장구와 꽹과리를 들고 신나게 농악을 하며 춤추고 있었다. 명색이 명예 부녀회장이라는 과분한 직분을 받은 난 부엌부터 들어가 봤다. 젊은 엄마들이 가마솥에 떡쌀을 찧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나물들,  항아리엔 수정과가 담겨 있고 바깥 마당에는 숯불 위에 바비큐까지. 자매 결연을 맺은 백호 라이온스 가족들과 철도공사 가족들이 아이들과 손을 잡고 가득 둘러섰다.

젊은 여인들은 아주 빠른 몸놀림으로 일하면서 연신 노인정 방안에 계신 할머니들께 음식을 갖다 드린다. 이장님은 양복을 멋있게 입으시고 반가운 얼굴로 손님들을 맞으신다. 호저면장님은 벌써 오셔서 약주를 받고 계신다. 풍악이 울리면서 식이 시작됐다. 일년간의 호사다마와 유명을 달리하신 분에 대한 애석함, 그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올해 해야 될 일들도 열거됐다. 마을회관 신축과 한지마을 조성 등 여러 가지 큰 일들도 낭독됐다.

마을 카페에 올린다고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쉬가 터진다. 한 어르신은 요즘 배운 컴퓨터로 명함을 인쇄하셨다고 색채가 든 명함을 자랑스러운 듯 내미신다. 또 한 어르신은 산 어귀에 미니 골프장을 만들었으니 놀러오라고 하신다. 하늘엔 멋진 연들이 걸려있다. 모두의 얼굴엔 희망이, 기쁨이 서려 있다.

고산리는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이 은거했던 곳이기도 하고 6.25전쟁 때에는 피난민들이 고개를 넘던 역사가 서려있다. 언덕 높은 곳에 아름다운 저수지가 있고 그 근처엔 예전 화전민들의 후예가 있다. 우리 대학생들에겐 아직 살아계신 노인들이 갖고 계신 삶의 역사와 방언들을 기록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외곽에 아주 귀중한 삶의 보고가 남아있다. 그 역사를 잃어버리지 않고 기록해두어야 한다.

지난 해엔  새 농촌을 건설하겠다는 마을 주민들의 의지를 합하여 '고산리'가 새겨진 아주 큰 표지석을 마을 입구에 세웠다. 전국적인 뽕잎 축제도 열고 해바라기 마을 조성도 시도해보고 꽃길도 예쁘게 가꿔놨다. 마을 대표들은 연신 대학을 찾아와 자문을 구한다.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다운 마을 경관을 조성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창의적인 친환경농업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머리를 맞대고 노력하는 그들의 너무도 자발적이고 너무도 협동적인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마을 어른들을 공경하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너무 보기 좋다.

원주는 도농통합 도시이다. 강원도에서는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원주시의 발전 모델은 몰역사적이고 무질서한 서울 근교의 부유(浮游)하는 위성 도시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변방의 퇴영적 폐쇄 도시가 되어서도 안된다. 변화 속에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 꼭 보전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이 '이야기'이면 더욱 좋겠다. '이야기' 즉 우리들의 정체성, 그리고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성,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 진정 통합된 도시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