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봉 초서천자문으로 만들어진 일본식 화로.

　서예사와 판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구한말 목판 원본이 일제강점기 일본식 화로의 장식품과 일본 분첩 뚜껑으로 훼손된 모습으로 발견돼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박물관 한선학 관장은 지난달 27일 서울 인사동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최근 입수한 고판화 원판을 공개했다.
　이날 한 관장이 공개한 목판은 구한말인 1899년(광무 3년) 전북 완산(지금의 전주)에서 상업적 출판을 위해 '방각본(일반 판매용 책)'으로 제작한 '한석봉 초서 천자문' 목판과 같은 시기 한글소설 '유충렬전'을 방각본으로 찍어내기 위해 제작한 목판. 아동용 한자 교본인 '한석봉 초서 천자문' 목판은 방각본으로는 처음 발견된 것이며, 한글소설 '유충열전' 목판도 한글로 쓴 한국 고소설을 인쇄하기 위한 원판으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이 귀중한 자료들은 제 모습을 잃고 '이로리'라 불리는 일본식 화로의 장식품과 일본식 분첩의 뚜껑으로 변형돼 충격을 주고있다. 화로상자는 한 관장이 지난 2005년 공개한 '오륜행실도 목판'과 같이 전서와 초서로 새겨 쓴 한석봉 천자문 목판 4장을 각각 가운데를 잘라 8장으로 만든 다음 사각형 화로 외곽 각 측면을 장식했다. 유충렬전 방각본 목판은 훼손정도가 더 심각하다. 둥근 분첩의 뚜껑으로 쓰기 위해 해당 부분을 둥글게 잘라낸 형태로 발견된 것.
　한 관장은 "이로리 화로 상자는 지난해 9월 국내 고미술상을 통해 구입하고 분첩은 일본에서 입수했다"며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이태영 교수를 통해 조웅전과 더불어 한글 고전소설의 쌍벽을 이루는 유충렬전 목판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2005년 '이로리' 제작에 쓰인 '오륜행실도 목판'을 공개한 이후, 다른 용도로 훼손된 귀중한 자료들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국내외에서 이런 유물들을 수소문한 결과 한석봉 천자문과 유충렬전 목판본을 입수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한 관장은 "두 유물을 감정한 남권희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교수가 서예사와 판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이 목판들이 일제강점기때 호사가들에 의해 완상용(玩賞用)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우리 조상의 삶을 위로해 주던 한글 소설의 목판 원판이 처참하게 오려져 생활도구로 전락한 모습을 두고 일본인만 탓할 일은 아닌 것 같다"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문화재를 사랑하고 있는지 뒤돌아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호 기자  mhkim@wonju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