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자
 1947년생, 부산 출생/ 14세에 아이 업고 4·19 시위대에 함께한 용감한(?) 소녀/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하는 아마추어 예술인/ 등산, 여행, 글쓰기 등 매일 바쁜 스케줄 소화 중/ 못 배우고 고생한 한을 한꺼번에 풀고 있는 사람

 아버지의 잠깐 외도로 원하지 않던 이복 여동생이 생겼다. 양육비를 주지 못한 죄로 엄마는 그 아이를 받아 키워야 했다. 그런데 아이는 이상하게 두 돌이 지나도록 일어서지를 못하고 말도 못 해 부모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TV에 이따금 나오는 에티오피아 난민 아이 같이 바싹 마른 동생은 늘 힘없이 징징거리며 졸기만 했다. 행상을 가야 하는 엄마는 그 아이를 내 등에 업혀주며 범일동에 있는 구호 단체인 일신 병원에 가서 우윳가루 배급을 받아 오라고 했다.
 

 내 나이 열네 살. 단발머리 소녀인 나는 엄마의 부탁대로 아이를 광목 티로 졸라 업고 우윳가루 자루는 어깨에 멘 채 병원 문을 나왔다. 그때 갑자기 요란한 함성에 이끌려 호기심 많은 나는 무슨 일인가 궁금해 범일동 큰 도로로 나와 봤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몰려왔는지 거리는 검정 교복을 입은 학생 떼가 어깨동무를 하고 스크럼을 짜고 구름처럼 밀려가고 있었다.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자, 어디에서 다쳤는지 피 묻은 와이셔츠를 입은 자, 부상당한 친구를 부축하고 가는 자···. 태어나서 처음 본 수많은 무리가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넓은 도로를 점령한 채, 차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사람으로만 넘쳐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구경꾼인 군중도 합세했다. 구경꾼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니 서울의 일류 대학생들이 혁명을 일으켰단다. 걸어서 걸어서 남으로 며칠을 밀려 내려오는 동안 지방 대학생까지 합류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 대원들이었다.
 

 한참을 넋을 잃고 구경하다가 아이를 다시 풀어 꼭 조여 다잡아 업었더니 마른 아이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나는 데모 대원에게 가까이 가서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검정 고무신이 이따금 벗어지려고 할 만큼 헐떡거렸다. 정신 바짝 차리고 계속 걸었다. 학생 오빠들은 다친다며 물러서라 외쳤다. 못 들은 체하고 버티던 나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승만 물러가라!', '이기붕도 물러가라!' 그런 구호를 함께 외치며 걷는 순간 마치 열사라도 되는 듯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카메라 기자가 내 행동이 신기한 듯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도 찍었지만 나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무작정 걷는 동안 불타버린 관공서도 지나고 부서진 파출소도 지나면서 인파는 점점 많아졌다.
 

 짧은 다리로 장정들을 따라 한정 없이 걸었더니 다리가 아프기도 했다. 날은 점점 어두워 오고 지금 여기가 어딘가 싶어 정신을 차려 대열을 빠져나와 보니 초량을 지나 영주동으로 가고 있었다. 배가 고프고 기운이 없어 몇십 리 밖의 집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골목으로 접어들어 아이를 끌러서 안고, 어깨에 매달린 우윳가루를 풀어 아이도 먹이고 나도 실컷 먹어 버렸다. 목이 멨지만 물도 없고 주위를 돌아보니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두워져 깜깜한 밤길을 터덜거리며 집에 왔더니 엄마가 달려 나오며 야단을 쳤다. 식구들은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나를 두고 불길한 상상을 하며 혹시 사고라도 당했나 하고 많이 걱정했단다. 내 이야기를 듣고는 기가 막혀 하며 어이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내 등에서 깃털처럼 가벼웠던 그 아이는 다섯 해도 못 살고 어느 날 밤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그 아이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편이 싸……하고 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