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어느 날, 일본 교토(京都)의 산조(三條) 뒷골목 골동거리. 길을 걷던 30대 재일동포 사업가가 한 진열장 앞에 멈춰 섰다. 뽀얀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에 그는 넋을 잃었다.

보면 볼수록 떠나온 고향이 떠올랐다. 주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200만 엔. 당시 집 두 채 값 정도였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지만 머뭇거리고 말고 할 일이 아니었다. 1년 할부로 달항아리를 손에 넣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간 고 정조문(1918∼1989) 선생의 이야기다. 백자 달항아리와의 우연한 만남 이후, 선생은 일본에 유출된 문화재를 모으기 시작했다. 고려 석탑이 고베(神戶) 지역 논바닥에 부서져 뒹구는 것을 보곤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아예 논을 통째로 사들이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우리 문화재 1천700여 점을 모아 1988년 교토 북쪽 시치쿠(紫竹) 지역의 한적한 주택가에 고려미술관을 세웠다. 이곳은 해외에서 한국의 문화재만을 전시하는 유일한 박물관이다.

간송 전형필 선생과 비견되며 '일본의 간송'이라 불린 재일동포 정조문 선생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감독: 황철민)'가 4일(오늘) 오후7시 원주영상미디어센터 모두극장에서 상영된다. 정조문의항아리 영화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사)한알마을이 주관하며, 김상수, 박귀래, 이상훈 씨 등 뜻있는 지역인사들이 힘을 보탰다.

2015년 제7회 DMZ국제다큐영화제와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정조문의 항아리'는 500일의 기적, 500인이 만든 영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2000년대 들어 그의 삶과 컬렉션이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영화제작이 추진되자 한국과 일본에서 500여명이 후원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선생이 남긴 영상 자료와 더불어, 유족들을 비롯해 그와 만나고 교류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고인이 품었던 조국애의 정체를 탐문한다. 그리고 정규 교육이라곤 초등학교 3년 밖에 받지 못했던 그가, 재일 동포이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며 어떻게 대쪽 같은 신념을 유지했는지를 조명한다.

정조문이라는 인간과 그가 남긴 고려미술관에 다각도로 접근하면서 희미해지고 있지만 이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선비 정신의 정수를 재구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조문의항아리 영화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선생은 '25년 뒤 통일될 테니 그때 조국에 미술관을 헌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면서 "소위 디아스포라(流民: 유민)의 삶을 살면서 조국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은 정조문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던져 준다"고 말했다.

영화 상영 전 불교미술사학자 최선일 박사가 정조문 선생의 삶과 영화 제작 배경을 설명하고 관람 후에는 토크쇼를 통해 질의응답 시간도 갖는다. 무료 관람으로 영화 상영 후 현장에 설치된 모금함에 자율적으로 후원금을 낼 수 있다. ▷문의: 010-5484-2187(박수영 (사)한알마을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