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며칠 후면 명절 중의 으뜸인 '설(설날)'이 돌아온다. 설은 새해를 시작하는 첫날이기도 하지만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날이라, 우리민족은 설을 그 어느 명절보다도 퍽 의미 있게 여겼다. 그런데 요즘 시국이 너무나 암울하고 서민의 생활을 좌우하는 물가마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어 누구나 할 것 없이 답답한 심정으로 설을 맞아야 할 것 같다.

 더구나 올해는 '닭띠 해'인데, 작년 가을부터 전국으로 번진 조류독감 때문에 삼천만 마리가 넘는 닭이며 오리 등이 생매장 당한 판국이라, 새해를 활기차게 열던 수탉울음소리조차 듣기 힘들게 됐다. 그래도 설은 설이다. 온갖 어려움이 많지만 잠시라도 기쁜 마음으로 설을 쇠었으면 좋겠다.
 

 어릴 적 설날을 떠올리면 즐거움보다는 맘을 졸였던 일들이 먼저 생각난다. 정월은 1년 중 세시풍속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달이다. 그중 하나가 '섣달그믐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풍속이다. 섣달그믐날 밤, 만두를 빚는 어머니와 누나들 옆에서 졸음을 이기지 못해 꾸벅거리면, 어머니는 일찍 자면 안 된다고 어린 우리들을 깨우곤 하셨다.

 어쩌다 풋잠이라도 들면 짓궂은 누나들이 눈썹에다 밀가루를 칠해놓고는 짐짓 놀란 목소리로 흔들어 깨웠다. 그러면 거울 앞으로 달려가 하얗게 변한 눈썹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 하나, 섣달그믐날밤에 '야광귀(夜光鬼)'가 지상으로 내려온다고 믿었다. 야광귀는 정월초하룻날 새벽닭이 울기 전에 잠자는 아이의 신발 중에서 제 발에 맞는 신발을 신고 사라진다는 귀신이다. 속설에는 설날 신발을 도둑맞은 사람은 그해 운수가 나쁘다고 하여 어른들은 일찍 대문을 걸어잠그고, 툇마루 벽이나 기둥에 체를 걸어두곤 했다. 야광귀가 신발을 훔치러 왔다가 벽에 걸린 체의 구멍을 세어보다가 틀리면 다시 세고 하는 사이, 새벽닭이 울면 황급히 도망간다고 믿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체를 걸어두는 것을 보고도 어린 우리들은 겁이 나서 신발을 안방 윗목에 들여놓고서야 잠자리에 들곤 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음력 정월 16일(혹은 14일)을 '귀신날' 혹은 '귀신닭날'이라 하여 여러 가지 액막이를 했다.
 

 설날 새벽, 사립문 밖에서 가장 먼저 들려오던 소리는 복조리를 돌리던 마을 청년들의 '복조리 사세요!' 하는 외침이었다. 그때쯤이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설음식 장만에 분주하셨고, 큰댁으로 설을 쇠러 가신 아버지 대신 누나가 사랑방 가마솥에 쇠죽을 끓이기 위해 불을 지폈다. 청년들이 울타리너머로 던져넣은 복조리를 가져다 방문 위에 걸고 복을 빌면 비로소 설날 아침이 환하게 밝았다.
 

 이제는 아슴아슴 사라져가는 민속들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은 한낱 옛날이야기거나 혹은 미신이라 업신여길 수도 있겠지만, 민속 하나하나는 우리 선조들의 생활 속에서 형성되고 전승되어 온 문화유산이다. 합리적인 설명은 할 수 없더라도 그 나름대로 의미와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민속이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이 땅에 함께 살아 온 선조들의 인생관이며 가치관이 녹아있기에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인데, 이제는 자꾸만 사라져 가니 아쉬울 뿐이다.
아침을 먹고 뛰쳐나온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니던 어린 시절의 설날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