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천 소장

흥업면 사제보건진료소 김명천(60) 진료소장은 오는 28일 대안리 승안동마을에서 마을잔치를 연다. 올 연말 퇴직을 앞두고 그동안 지역주민들에게 받은 과분한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자리이다. 지난 1983년 10월 1일 사제보건진료소에서 근무를 시작해 지금까지 33년3개월을 이곳에서 붙박이로 재직했다. 그 세월을 빛나도록 만들어준 주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잔치를 여는 것이다.

인천시 주안동에서 나고 자랐고, 경기간호대학을 졸업한 뒤 정신과 병원에서 근무했다. 사제보건진료소와의 인연은 대학 동아리 선배의 권유에서 비롯됐다. 당시 정부는 의료기관이 없는 전국 오지마을에 보건진료원을 설치하고, 지원자를 모집했다. 그런데 오지마을로 가려는 지원자가 없으니 모집공고는 계속 이어졌다. 눈동자가 모집공고에서 떠나질 않으니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보건진료원에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오지 중의 오지를 선택하고 싶어 강원도로 향했다. 당시 27세였다.

원성군 보건소 직원을 따라 사제리에 첫 발을 들였을 때는 동화책에 나오는 마을 같았다. 볏짚을 이어 엮은 소담스런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나무를 얼기설기 쌓아올려 만든 담장은 고향에선 볼 수 없던 이국적인 풍경으로 다가왔다. 마을에 전화기라곤 이장님 댁에 딱 한 대 있었다. 재래식 화장실의 자그마한 전구가 불빛을 제대로 내줄리 만무했고, 당연히 수도도 없었다. 함께 동행 했던 어머니는 일주일을 머물며 매일같이 돌아가자고 보챘다. 그러나 김 소장은 이러한 환경이 어색하지 않았고, 불평이나 걱정은커녕 황무지라도 개간하듯 주민들을 만나러 다녔다.

물론 진료소도 없었다. 창고로 사용하던 새마을회관 바닥에 왕겨를 두텁게 깔고, 장판을 놓아 진료소를 꾸몄다. 그런데 상급기관인 원성군 보건소에서는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일을 못하겠다고 어깃장을 놓고서야 찌그러진 캐비넷과 철제책상, 진료용 침대와 약을 보내왔다. 사제보건진료소는 그렇게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농협에 다니던 남편 박종호(61) 씨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그런데 남편은 신혼 때부터 괴사성 구내염이 자주 발병했다. 눈이 침침해졌고, 두통도 심했다. 발병 후 22개월 만에 확인된 병명은 듣도 보도 못했던 베체트 신드롬이었다. 바이러스가 혈관에 염증을 일으키는 병으로, 우리나라 베체트 환자는 약 1천200명이다. 그 가운데 뇌혈관에 생긴 환자는 200여명으로, 남편이 그중 한사람이었다. 남편의 병은 매달 새로운 증세로 재발했고,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겠다는 의사 소견까지 들어야 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는 형부가 치료제는 없지만 도움이 될 만하다며 보내준 약을 먹어서인지 서서히 호전돼 2014년 8월 완쾌 판정을 받았다. 의사들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다.

남편을 간호하느라 진료소를 비웠어도 주민들은 이해했고, 오히려 함께 마음 아파하며 위로해주었다. 남편의 발병 초기에 아들 민철(29) 씨는 3살, 딸 하늘이(28) 씨는 2살이었다. 당시 아이들은 주민들이 키웠다. 천둥 할머니, 춘난이 할머니, 신애 이모 등에 엎드려 컸다. 지금도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유난히 살갑게 대하는 건 어렸을 적 소중한 추억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몸펴기운동, 웃음운동, 노인치매교실, 웰빙체조, 노래교실 등을 연중 운영하며 고마운 마음을 갚아나갔다. 하지만 보건진료소장은 외로운 직업이었다. 사시사철 혼자서 1천명 넘는 주민을 상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도 사제보건진료소장이란 직업을 선택하겠지만 딸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일이다. 늘 주민들 속에 있어도 외로운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지난 2004년 사제보건진료소를 신축할 당시 휠체어를 타고 언제든 드나들 수 있도록 턱이 없는 진료소를 만들도록 주문했다. 턱이 낮아야 한다는 건 평소 지론이기도 하다. 보건진료소는 주민들의 사랑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더라도 진료실은 닫지만 운동치료기가 놓여있는 방은 언제든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둔다. 마을 사랑방이다 보니 늘 주민들이 있어 도난 염려도 없다.

33년3개월의 기나긴 세월을 한자리에서 지킨 김 소장은 이제 훨훨 날 준비를 하고 있다. 당분간은 원 없이 놀 생각이다.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