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순리(順理)에 따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중용(中庸)의 도를 지키며, 아름다운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여유로운 낮 시간을 이용해 모처럼  단풍으로 붉게 물든 치악산을 다녀왔다.

아름다운 계곡과 천년고찰 구룡사를 품고 있는 명산인 치악산이 시내 가까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편안하게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은 원주에 살면서 가질 수 있는 큰 기쁨 가운데 하나다. 치악산은 아름다운 자연을 통하여, 그리고 오래된 고찰이 주는 신비로운 힘을 통하여 일상에 지친 나의 심신에 위안을 주는 치유의 공간이다.

계곡을 지나 다리를 건너고 숲길을 따라 걸으며 어지러운 상념을 지우고,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에 세상으로부터 얻은 긴장을 달래고, 부처님의 평화로운 미소를 보며 혼탁해진 마음을 내려놓고, 수능을 준비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촛불을 밝힌다.

하얀 반투명의 몸통에 소원을 적고, 불을 붙이고, 눈을 감고 손을 모으는 행위를 통하여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안타까운 어미의 부채의식을 조금은 내려놓으며 절집을 둘러 본다.

절집마다 제단을 밝히기 위해 초를 밝힌다. 초는 옛날에는 주로 부잣집에서 사용하였으며, 일반서민들은 제사에나 사용할 수 있었던 값비싼 물건이었다. 우지와 같은 동물의 기름을 끓이는 방식으로 몇 번의 정제과정을 거쳐 초를 만들었고, 꿀벌의 집을 끓여 나온 기름인 밀납으로 만든 것을 최고로 쳤다.

근세에 들어서는 석유를 정제하면서 나오는 파라핀을 이용하여 만든다. 초는 물리적으로 고체 상태에서 액체 그리고 기체로 변하여 산소와 결합하는 화학적 과정을 거치면서 빛과 이산화탄소와 물을 남긴다. 이 과정을 우리는 나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것으로 묘사하고, 희생의 상징으로 은유한다.

지난 11월 12일 광화문에서는 백만의 대한국민이 나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희생의 메타포(metaphor)인 촛불을 들었다. 피가 끓어 넘치는 청춘들로부터 87년 민주항쟁의 주역에서 이제는 기득권이 된 중년 그리고 4.19와 5.16을 경험한 노년들까지 모든 세대가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섰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젊은이는 젊은이의 목소리로, 늙은이는 늙은이의 목소리로 누군가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한결 같이 얘기하고 있다. 그들의 행동은 조용하고 평화로우나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청와대의 푸른 지붕을 내려 앉힐 만큼 크고 높고 무겁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하면서 강렬한 목소리가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인가? 민심의 목소리는, 외신들까지도 백만 대한국민의 평화의 행진을 놀라워하고 있을 지경인데, 귀를 기울여야할 높은 곳에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몸통을 살라 불을 밝히는 국민 대부분의 분노가 시간이 흐르면 덮혀지고 잊혀지는 "대중의 망각"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이다. 누군가가 그토록 증오하고 싫어한다고 하던 그것이다. 국민에게 응징하라고 요청했던 그것이다. 배신감은 누군가가 얘기하듯이 배신한 자를 징벌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배신은 용서함으로써 치유되는 것이다. 아이러니다. 용서는 누군가가 그토록 국민에게 호소했던 '진실한 사람'만이 진정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용서는 정확한 진실과 통렬한 반성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누군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인간세상의 일이 어느 것 하나 누군가의 희생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매일 먹는 세끼 식사에도 농부의 피와 땀이 녹아 들어 있고, 주말저녁 우리를 웃게 만드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피디와 스텝들의 밤샘과 피로가 담겨 있다. 하물며 우리가 바라는 자유와 정의가 살아있는 민주주의는 두말 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현장에 서있다. 이 변화의 시간을 완결하는 것은 촛불을 들고 있는 우리들의 희생이다.

전영주 상지대 관광학부 호텔컨벤션전공 교수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