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한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추모와 증언과 분노의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포스트잇에 담겨 강남역 10번 출구를 덮었고, 자발적인 추모제가 이어졌다.

대규모 침묵행진, 달빛시위 등 시민들의 직접행동도 이어졌다. 이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온라인에서 광범위한 '여성혐오반대' 선언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일 정부는 '여성대상 강력 범죄 및 동기 없는 범죄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종합대책은 범죄안전 사각지대 해소, 정신질환자와 알코올 중독자 조기 발굴 및 치료, 공권력에 의한 정신질환자 행정입원 시스템 구축, 여성대상 범죄자에 대한 관리 강화, 처벌 가중, 피해자 지원, 양성평등문화 조성을 담고 있다.

이 대책으로 강남역 사건에서 시작된 시민들의 두려움과 분노가 안심과 신뢰로 바뀔 수 있을까? 원주에서도 원주경찰서가 8월 31일까지 '여성 안심 순찰대'를 운영한다고 한다.

늘 그랬듯이 전국을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지고 나면 정부, 정치권, 지자체에서 재발 방지를 막겠다며 정책을 내 놓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 발표와 끊임없는 논의를 거친 대안 마련에도 고개가 끄떡여지고 안심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찰청의 2013년 강력범죄 피해자 통계에 의하면, 피해자 비율 90.2%가 모두 여성이고, 4년간(2011~2014) 강력범죄 피해자의 성별이 '불상(不詳)'인 경우를 제외하고 성별이 밝혀진 10만3천169명의 성별은 남성 약 14.76%, 여성 약 85.24%였다.

강력범죄 피해자 85%가 여성이라는 여성가족부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경찰청이 발간한 '2012-2014년 경찰범죄통계'에서도 생활비 부족 등이 범행 동기로 알려진 강·절도 역시 9만7천723건 중 2만7천187건(27.8%)이 우발적이었다. 5대 강력범죄 3건 중 1건 이상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범죄인 셈이다. 그리고 그 피해자는 여전히 여성이 많다.

이러한 통계는 단순히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만 부각되어 있을 뿐 인권 보호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빠져있다. 과거 가부장적 제도에서 교육 받고 개개인을 통해 체화되어 현실에서 실천되는 성차별은 사회 곳곳에서 '일상화' 되어있다.

성차별은 고스란히 인권침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사회구조 안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용인하고 정당화 시키는 편견은 많은 노력과 운동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있다.

특히 지방일수록 여성차별은 조직과 공동체 안에서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사적이고 사소한 다툼으로 취급하고 지역사회의 유리창처럼 훤히 들여다보이는 인맥 속에서 피해자임에도 피해자라고 말하지 못하는 심리는 중소도시일수록 심각하다.

지역에서 성추행 사건이 몇 번 이슈화 된 적이 있었는데 피해 사실을 공론화 하고 법적 소송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좁은 지역사회에서 피해자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친척의 지인 등 거미줄처럼 얽힌 인간관계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실제 원주민우회를 찾는 성폭력 피해자 대부분이 자신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아픔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고민하기 보다는 외부에 사실이 알려졌을 경우 이후 생활이 불편할 것을 우려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이어서 피해자가 됐다는 논리보다는 자신의 인권을 보호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에 가해자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권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어서 스스로 인권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양성평등이 여성 특혜도 남성 역차별도 아닌 민주주의 사회의 상식이듯이 인권 보호 역시 사회적 약자, 강자 누구에게나 지켜져야 하는 우리 사회의 기본 권리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천부의 권리인 천부인권(天賦人權)이란 인종, 성, 종교, 장애, 출신, 지위에 대해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사람으로서 동등하게 권리를 존중해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헌법 제10조에서 천부인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제는 지역에서도 인권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교육이 이뤄져야 할 때이다.

지숙현 원주여성민우회 대표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