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필리버스터란 생소한 이름의 무제한토론이 8박9일 19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국회방송은 개국 이래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정치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은 모처럼 국회의원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테러방지법'이란 이름의 법이 '무제한국민감시법'이라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게 되었고, 화가 난 대통령은 책상을 열 번이나 치고 말았다. 민의를 전혀 대변하지 못하고 계파싸움으로 분열된 무능한 야당의 국회의원들이 개인으로는 저렇게 멀쩡하게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지식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단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한 은수미, 전순옥, 권은희, 진선미, 최민희, 서영교, 심상정 등 여성의원들의 활약에 깜짝 놀라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번 세계 최장기 필리버스터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양성평등을 이뤄낸 최초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5%로 세계 100위 수준인 것에 비하면 39명 중 18명은 놀라운 숫자다. 게다가 발언한 여성의원 대부분이 비례대표의원이었다. 비례대표와 여성할당제가 왜 중요한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다.

그러나 28일, 여야 합의로 확정된 선거구획정안은 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이다. 19대 임기 내내 비례대표를 늘리자는 목소리가 줄을 이었지만, 결과는 7석 감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야당은 이 선거구획정안 처리를 위해 필리버스터를 중단했다. "헌법에 보장된 시민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언론의 자유 누리고 표현의 자유 누려야 합니다.

어떤 억압으로부터도. 자기 운명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못하게 할 수 있는 법"인 테러방지법은 결국 우리 국민 모두를 잠재적 테러분자로 만들고 말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테러에 정말 취약한 나라일까? 그렇다면 비상사태 운운하며 법안 통과를 주장하는 여당의원들은 왜 저리 태평한 것일까?

정신의학 용어로 '망상(妄想)'이란 '병적으로 생긴 잘못된 판단이나 확신'을 뜻한다. 비합리적·비현실적인 생각을 계속 주장하며 외부의 자극이나 제지를 거부하는 사람은 망상증 환자로 의심하게 되는데 이런 망상증은 자신이 예수나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개인의 문제일 땐 격리치료하면 되지만 전염병처럼 사회적으로 만연될 때는 그 피해가 매우 크다.

'테러방지법'은 분단이라는 통제된 공간에서 북의 도발이라는 일방적 지식을 주입하거나 공유함으로써 '의심이라는 망상'이 '테러에 대한 확신'이라는 망상체계를 수용함으로써 국민들이 통제를 당연시하도록 만들고 있다.

문제는 "의심받는 사람은 늘 빈민이고, 여성이고, 탈북자이고, 가난한 나라 출신의 외국인입니다. 의심은 늘 정권의 반대편에 선 사람과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은 철저히 합리적이어야만 하고, 정보 관리는 반드시 통제되어야 합니다. 비합리적인 의심과 통제되지 않는 정보는 권력자가 약자에게 휘두르는 칼이 됩니다. 의심은 합리적이고 평등해야 합니다.

정보를 관리하는 행정부는 국민에게 통제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결코 물러날 수 없는 법치주의의 기본 원칙입니다."라는 진선미 의원의 말처럼 법치주의를 능가하는 이 법안이 가진 무소불휘의 힘이 정말 걱정된다.

지금도 '헬조선'을 외치는 우리 국민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조지오웰이 예견한 '1984'가 아니기를 바라지만 국회의원이 필리버스터로도 막지 못한 이 정권의 독주가 4.13 총선에서 어떻게 민의로 나타날지 참으로 두려워지는 2016년 봄이다. "테러는 정보를 독점하는 비밀스런 조직에 의해 예방되지 않는다.

테러는 소중하게 지키고픈 삶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국민들의 힘으로 예방된다"는 것을 국민들이 느껴서 자신의 권리를 선거에서 되찾기만을 바랄 뿐이다.

정유선 성평등연구소 대표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