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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19주년 특별기획: 중국 원주촌, 그 후 10년 ①

일제강점기 115가구 529명 이주 '회한의 역사' 김민호 기자l승인201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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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투데이는 지난 2005년 창간 10주년 기획취재 '중국 원주촌을 찾아서'를 통해 일제강점기 일제의 선동과 회유, 협박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된 원주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도한 바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안고 낯선 타국 땅에 뼈를 묻어야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보도 이후 원주시가 현지 답사를 통해 '중국 원주촌 연구'를 발간하는 등 원주촌 기록 정리에 나섰고 2007년에는 이주 1세대 5명을 원주로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민간 차원의 교류 및 원주촌 후손들에 대한 지원 등이 활발하게 논의됐지만 2007년 이후에는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올해는 중국에 살고 있는 원주사람들의 이야기가 고향에 소개된 지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원주투데이는 이미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진 그들이 궁금했습니다. 당시 우리가 만난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들이 집단부락을 이루고 살았던 원주촌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그래서 다시 원주촌을 찾았습니다. 중국 길림성 조선족 자치구 연길시와 안도현 일대, 도문 등지에서 아직 생존해 있는 이민 1세대와 그 후손들을 만나 그들의 지난 10년의 삶과 고향 원주에 대한 생각을 들었습니다.

1. 프롤로그-만주로 간 사람들
2. 원주촌, 그리고 청구자
3. 남은 사람과 떠난 사람들
4. 민간 교류 20년 '정암촌'
5. 민족혼을 지키는 사람들
6. 좌담회-원주와 중국 원주촌

만주로 간 사람들

1937년 봄 115가구 529명의 원주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멀고 먼 여정에 나선다. 도보로, 트럭으로, 기차로, 다시 수레를 갈아 타고 이들이 향한 곳은 만주. '집을 짓고 문패까지 붙여 뒀다. 식량은 풍족하게 배급하고 땅도 너무 많다. 종자나 농기구도 모두 준다'는 총독부의 선전을 믿고 '기회의 땅'을 찾아나선 길이다.

가는 길부터 순탄치 않았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비좁은 화물칸에 사람을 몰아넣어 시간의 흐름도 모른채 그저 흔들리는 기차에 몸을 맡겨야 했다. 지정면 보통리가 고향인 이도구(당시 9세, 2008년 작고) 씨는 "한치 앞을 볼 수 없으니 자고 일어난 자리에서 배설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당연히 위생은 말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 간도성 명월구(현재의 길림성 안도현)에 닿아 다시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만주인들이 끄는 청차(말이 끄는 바퀴 4개달린 수레)에 태우고 황구령(荒溝嶺)을 넘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임시거주지인 안도현 만보향 남십기. 사방이 눈 덮힌 황량한 벌판이었다.

그 곳에서 눈 위에 갈대로 엮은 움막을 숙소라고 제공받고 나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박종옥(86·호저면 만종리 출신) 씨는 "춥고 무서워서 밤새 눈 한 번 붙이지 못한 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기억한다.

그 곳에서 지낸지 사흘만에 함께 온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부족한 식량으로 굶어죽기도 했지만 낯선 땅에서 얻은 풍토병과 4월까지 이어진 살인적인 추위에 의한 동사자가 대부분이었다. 몇몇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야음을 틈타 고국으로 도망갔지만 지리도 모르는 곳에서 감시와 통제를 피해 도망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땅을 팔 수 없어 눈 속에 가매장한 시체들은 또 다른 수난을 겪었다. 인근 만족인이 기르는 개들이 눈 속을 파헤치고 시체를 끌어 내 뜯어 먹기 시작했다. 4~5마리씩 무리를 지어 시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뜯어먹는 모습은 기억하기 조차 싫은 끔찍한 광경이었다.

"개들이 배를 채우고 떠난 자리에는 인골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신림면 신림리 출신 김광복(당시 6세, 2008년 작고) 씨는 "흰옷을 입은 인육에 맛을 들인 개들이 흰옷을 입은 조선족만 보면 달려들어 집 밖에 나가질 못했다"고 회고했다.
 
구청구자에서 다시 청구자로

어려움 속에서도 고된 노역이 시작됐다. 일제의 만주 이민은 집단부락 건설을 원칙으로 했다. 이 집단부락은 민간인 거주지역이면서 실제는 준군사기지 역할을 했다. 부락을 중심으로 사방에 높이 3-4m의 토성을 쌓고 토성 바깥에 2m 깊이의 해자를 팠다.

또 그 밖으로 철조망을 친 뒤 다시 그 바깥에 높이 4-5m 이상의 나무담을 둘러쳤으며, 사방 네 귀퉁이를 포함한 각 토담 중간 등 모두 10여 곳에 포대 및 보초막을 설치해 부락에 주둔한 군경과 자위단으로 경비케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농민의 만주 이민에 '농업을 위시한 만주의 산업을 개발하고, 조선의 과잉인구를 해소하며, 취업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만주를 중국 및 아시아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이민자들로 집단부락을 만들어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항일무장세력들을 공격하는 군사기지로 활용했다.

임찬경 박사(국학연구원)는 "일제는 조선농민을 만주로 대량 이주시켜 식민지배로 인해 격화된 조선 국내의 사회모순을 해소하고, 이주된 조선인들을 이용해 한족과 대립시키면서 동북지역을 영구적인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의도했다"고 설명했다.

원주 출신 이민자들은 4월 초부터 남십기 동남쪽 산자락에 가로, 세로 각 500m의 토성을 쌓았다. 한 달 뒤 먼저 북쪽 토성을 완성하고 그 곳으로 이전했다. 현재 구청구자로 불리는 첫 정착지였다. 1937년 7월 '조선일보'는 십기가 일대가 불모습윤지여서 그 곳에 이주시킨 200호를 인근으로 옮겼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그 곳이 바로 구청구자였다.

그러나 구청구자 역시 수질 등의 문제로 안정적인 거주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다시 옮긴 곳이 해방 이후까지 원주촌이 실재했던 현재의 청구자이다.

원주 사람들은 이곳에 부락을 건설한 뒤 고향의 이름을 따 원주촌으로 명명했다. 이 때가 만주로 이민온 지 1년이 된 1938년 봄으로, 원주 출신 이민자들의 삶의 터전인 원주촌의 역사가 195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그 출발점이었다.

피땀으로 일군 터전 '원주촌'

부락을 건설해 정착한 뒤에도 쉴 틈이 없었다. 도로작업과 채벌작업은 물론, 일본군이나 만주군이 항일연군을 공격하는 전투에 물자를 나르는 일 등이 일상이 되어 사람들을 지치게 했다. 밤이면 중·장년들은 소위 자위단이라는 이름으로 망루를 지켜야 하는 고단함도 함께 했다.

수 천년 묵은 황무지를 어렵게 개간하고 나면, 만주척식주식회사에서 나와 토지면적과 파종작물을 조사한 뒤 그에 따라 무거운 공출량을 미리 산정해놓고 가을이면 가차없이 거두어들였다. 작황이 좋지 않을 때는 이미 정해진 양의 곡식을 사서라도 바쳐야 하는 기막힌 현실이었다.

이도구 씨는 "농사를 제대로 지은 것은 해방 이후였다"고 증언할 정도로 원주촌 사람들은 수시로 일제의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강인한 원주인의 피땀은 원주촌을 차츰 사람 사는 마을로 바꾸어 갔다.

원주 사람들은 동향출신이라는 일체감으로 빠른 속도로 마을을 가꾸어 나갔다. 1939년 원주촌에 4년제 소학교를 세우고 마을 앞산에는 상여집도 지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동제를 지내는 서낭당도 꾸몄다. 고향을 빼앗긴 이민의 땅에서도 명절이면 꽹과리와 장고소리가 들리고, 마을은 희망을 키워 갔다.
 
해방 이후의 원주촌, 그리고 원주사람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선포되자, 원주촌은 술렁거렸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웃과의 송별모임이 잦아졌다. 일제의 강압과 거짓선전에 속아 집단이민을 왔고, 군사시설과 같은 토성 안에서 억압과 착취를 받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 해방과 동시에 귀향의식이 강하게 일었다.

반면 피땀 흘려 개간한 삶의 터전에 미련이 남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갈등 속에 떠나는 자와 남는 자로 갈렸다. \

1938년 봄에 건립된 원주촌은 1956년 지명이 청구자로 바뀌고 지금은 외지에서 온 한족들만 거주하는 마을이 됐지만, 아직도 70여년 전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특히 원주촌 인근 안도현 일대는 물론 중국 각지에 원주촌 1세대 및 그 후손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원주 특색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가고 있다. 

   
▲ 지난 2007년 원주시 초청으로 70년만에 고향을 방문한 김광복 씨는 마을 입구의 전나무를 보고 참았던 눈문을 쏟아냈다.
70년만의 귀향 '눈물 바다'
이주 1세대 5명 2007년 고향방문

중국 속 원주마을 '원주촌'이 지역에 알려진 뒤 중국에 살고있는 '원주사람들의 이야기'는 지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를 기억하는 고령의 노인들이 형, 친구, 백부의 소식을 문의하는 안타까운 사연도 이어졌다.

원주시도 본예산에 원주촌 연구조사비를 편성해 2007년 학술총서 '중국 원주촌 연구'를 발간했으며 같은 해 원주시와 항일독립운동 원주기념사업회는 중국 원주촌 1세대 5명을 원주로 초청했다.

70년만에 고향 땅을 밟은 이들은 옛 기억을 더듬어 고향마을을 찾고, 강원감영, 시립박물관, 재래시장 등을 둘러봤다. 기억속에서는 언제나 푸근하고 정겨운 고향이지만 지나버린 70년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했다.

특히 신림 고향마을을 찾아 오열하는 고 김광복(2008년 작고) 씨의 모습은 많은 시민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보건지소 앞 전나무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간 김 옹은 "가족들과 중국으로 떠날 때 이 전나무가 그 때도 이 자리에 서 있었다"며 반가워 했다.

하지만 김 씨는 이내 굵은 눈물을 떨궜다. 감정에 북받쳐 슬픈 독백도 이어졌다. "고향을 떠날 때는 할머니, 부모님, 고모, 삼촌, 형제들과 함께였는데 70년만에 돌아와 서 있는 지금은 나 혼자구나…. 그래도 너만은 이 자리에 남아 반겨주니 고맙다…." 짙은 회한에 탄식하던 노인은 한참이나 전나무를 부여안고 그렇게 눈물을 그치질 못했다.

반가운 일도 있었다. 박정옥(88) 씨는 중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원주시와 기념사업회 도움으로 생면부지인 사촌동생과 친척을 만나 감격스런 포옹을 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습니다.

 

 


김민호 기자  mhkim@wonju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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