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이은학

한라대학교 교수

지독히도 나라 살림이 어려웠던 시절에 하얀 와이셔츠 차림인 은행원은 세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화이트 칼라의 대명사인 귀족 노동자였었던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그들이 새천년 첫 해의 세밑에서 혹한 속에 생존권을 내세워 투쟁하는 모습은 아이러니 하게도 세월의 무상을 느끼게 하며 뉴 밀레니엄 첫해의 대미를 짙은 어두움으로 장식하고 말았다.

요즈음 경제사정도 사정이려니와 속마음이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고 한다.

물질적으로 힘들다고 마음마저 힘들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줄 알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지난 세모에 거리에 울리던 구세군 자선냄비 소리가 청아하게 들리는 사람은 그래도 좀 나은 사람들이고 그 소리가 처량하게 들리는 사람들은 삶에 너무도 지치고 지친 사람들이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행복하다는 말이 사치스럽게 들리는 사람들도 분명히 많이 있을 테니 말이다. 거리의 노숙자끼리 하루 밤 자리다툼으로 목숨까지 잃는 살인사건까지 겹쳐 더욱 암울했던 지난해가 조용히 가버리고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새해가 밝아 왔다.

오늘은 새해의 첫날이다.
‘설’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해에 통합되어 가는 과정으로써 새해에 통합되기에는 익숙하지 못한 단계로 ‘설다’는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분명 오늘이 ‘설날’이 아니겠는가.

오랫동안 구정이니 신정이니 오락가락하다 음력 정월 초하루를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의 하나인 ‘설날’로 정했으니 딱히 할 말은 없으나, 첫날인 오늘 설날의 의미만은 되새겨 보고 싶다.

‘설’이란 해가 바뀌면서 상서롭고 복된 한 해가 되기를 빌고, 조상이나 어른 또는 이웃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의미에서 여러 가지 행사와 놀이가 진행되며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가지고 조심한다는 날이다.

어려서 세배를 가면 두 말 안하고 절이나 넓죽이 하면 되었고, “과세나 잘 했나” 하는 답례를 받았던 것이 보통인 듯 한데 이것이 “과세를 하는 동안에 별고 없었나” 하는 말인지 “과세를 하는데 음식장만이나 흐뭇이 했나” 하는 말인지 똑 떨어져 들리지 않는다.
“과세나 잘 했나” 하는 ‘나’자는 더구나 미묘한 것이어서 이 뒤숭숭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에 정초라고 약주 한잔이나마 부어 올렸나 하는 염려의 뜻도 되겠고, 어렵더라도 잔만은 올리게라고 점잖게 다짐받는 덕담의 뜻이 될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명랑하고 쾌활한 맛을 얼른 찾아보긴 어려운 듯 하다. 요새는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는 말을 많이 듣는데 복을 받으라 해서 줄 건덕지도 없는 것도 딱하거니와 어디 다른 데 가서 복을 받으라는 말도 아닐 것이다.
“복 많이 받으셨습니까” 하는 사람도 있으나 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본인도 알 까닭이 없는 것이어서 이것도 올바른 인사법인지 모르겠다.

길에서 만나면 “어디 가십니까” 하는 것이나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는 것이 남의 사생활에 간섭을 하는 일이 된다 해서 비난을 들은지가 오래된다.
동방예의지국인 나라에 만만한 인사말이 적은 것이 이상하다고 하기 전에 예의가 극진하고 이웃을 걱정하다보니 이렇게 가식 없고 다정한 인사가 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까.

요즘처럼 더욱 속마음이 힘든 시절이고 보니 형식적인 인사말보다 옛 어른들의 염려하는 마음과 사랑이 담긴 가식없는 인사법을 새롭게 쓰는 것이 어떠할런지.

올해부터라도 “과세나 잘 하셨습니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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