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학

한라대학교 교수

몸서리쳐지는 보릿고개, 춘궁기시절의 이야기이다. 전날 잔치가 있었다는 동네 어느 집 문전에 밥 한바가지가 쏟아져 있었다는 소문에 동네 사람들은 천벌 받을 짓이라고 흥분하여 수군수군 흉들을 보았것다.

그러나 “이 때가 어느 때라고 밥을 쏟아버리다니” 하고 개탄하던 사람들도 그 사연을 듣고 나서는 멍하니 말들을 멈추고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인데. 잔칫집에서 부엌일을 하던 중에 몰래 밥한바가지를 퍼내 가던 아낙네가 그것을 노나 가지자는 또 하나의 아낙네와 싸움이 붙어 밥 바가지가 땅에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필경 이 두 아낙네의 오두막살이 집에서는 핏기 없는 아이들이 엄마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을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이 이 얘기를 듣는다면 틀림없이 “밥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잖아” 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웃을 일도 경제력을 내세워 자만할 일도 아니다. 사회 지도층의 잘못이나 민초들의 이기적 다툼에 함께 쪽박 찰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이겠는가.
우리는 불과 일년 전 잘못된 점은 모두 청산하고 새로운 마음과 자세로 새 천년을 맞이하자고 난리법석을 피웠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맞이한 새 천년의 첫해가 다 지나가고 있는데 희망은 커녕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암울한 연말을 보내고 있다. 썩은 것은 정치와 행정과 경제뿐이 아니다.

어느 한 곳 멀쩡한 곳이 없는 온 세상이 썩은 냄새로 진동을 한다.

어디로 어떻게 갈지 모르는 블랙홀이 도처에 산재되어 있다.

대우자동차가 노조의 구조조정 동의서를 거부하는 바람에 부도처리가 되었다는 사실에 노조 내부에서도 공분이 일었다 한다.

뒤늦게나마 동의서가 제출되어 청산은 면하고 법정관리로 들어갈 전망이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이제 바야흐로 공기업의 노조들이 선도하는 노동계의 동투가 시작되었다. 구조조정만이 살 길 이라는 정부와 생존권을 내세워 파업으로 맞서는 극한대립이 어디까지 갈지 걱정이다. 우리의 민초들도 양측을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바가지를 깨는 공멸의 길로 들어서는 그들의 모습에서 쪽박을 차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개혁과제가 이해집단의 반발에 부닥칠 때마다 인기주의로 흐르거나 원칙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집단이기주의를 조장한 면도 있다. 공기업 개혁을 외치며 한쪽으로는 낙하산 인사를 함으로써 신뢰를 잃었다.
얼마 전에 끝난 ASEM 회의로부터의 뉴스는 세계화의 환상적인 면들만 보여 주면서 우리를 취하게 했다. 정상들을 후대하기 위해서였을까. 이상하리 만치 우리의 언론도 부정적인 면은 일절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회의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회담의제를 본다면 우리의 현실과 유리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하면 좀더 구조조정을 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좀더 효율적으로 투자를 하여 순익을 낼 수 있는가가 이 회담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처음부터 ASEM 의 순기능과 함께 역기능에 대한 사실을 솔직히 밝힘으로써 국민적 공감을 만들어 내야 했다.
우리의 노동계는 물론 아시아 각국의 노동계는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정부는 무엇보다 이 질환부터 치유해야 한다. 스스로 불신을 자초한 점은 인정하고 진정 진솔한 모습으로 믿음을 주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노동계의 어느 노조원도 공멸의 길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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