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이라는 연대를 적어야 하는 경우가 생길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들고, 마음의 외진 한 구석에서는 모락모락 부끄러움마저 피어난다. 원한에 맺힌 20세기라도 되듯이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막연히 희망에 차서 21세기의 첫해인 2000년을 시작하고 이제 그 한해도 9월의 마지막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금년의 가을은 청명한 날보다는 흐리고 비오는 날이 많았다.
천지개벽을 앞둔 긴장된 시간처럼 하늘은 허구한날 잔뜩 골난 얼굴을 하고 있다. 시커먼 먹장구름 사이로 번개가 길을 가르면 그 틈 사이로 불벼락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무슨 일이 벌어지기는 벌어질 것인가?
어느 학자는 21세기의 시작은 2000년이 아니라, 2001년부터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은 어떠한 시기인가? 20세기의 묵은 부패물들이 모두 다 곪아서 터지는 시기인가? 정치와 사회 그리고 종교와 교육, 그 어느 곳이나 부패하여 냄새가 진동하지 않는 곳이 없다.
거짓을 포장하기 위하여 진실이 동원되고, 지성인들의 말과 행동은 늘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현 사회는 정신분열증에 사로잡혀있다. 사회를 하나의 몸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의 사회는 미치지 않기 위하여, 올바른 정신을 갖기 위하여 몸부림을 하고 있다. 사회는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몸의 내부로부터 부패물들을 토해내고 있다. 그리고 이 토악질의 내용들은 2000년에 다 이루어져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사회라는 몸이 살아남기 위하여서는 건강한 세포가 살아있어야 한다. 어두운 밤의 풍랑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남기 위하여 사회는 등대의 불빛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훗날 우리가 그때의 등대의 불빛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인가?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예술가의 삶에 우리는 목말라야 한다. 우리가 그 예술가일 수는 없는가? 순수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공기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할 수 있을 그러한 세기를 우리는 창조할 수는 없는가? 이 시대는 새로운 위대한 예술가의 탄생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시대가 진정한 예술가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곧 우리가 진정한 예술가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미래를 힘차게 열어줄 비전의 세계를 우리는 찾아 나서야 한다. 비판과 비난이 있다면, 그 화살의 본래 목적은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피부로 와 닿는 현실은 남북의 화해나 화합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 주가가 떨어져 경제의 불황이 예견되고, 불편하고 위험천만한 의료정책이고, 기름 값 인상으로 물가가 올라 국민들의 호주머니 속이 가벼워졌다.
이 어둡고 축축한 가을 우리는 어디에서 따스한 빛줄기를 찾아야 하는가? 아픔을 함께 나누자고 하지만, 그 아픔이 끝나고 나면 그 뒤에 어떠한 비전이 있는가? 지금까지 그러하였다면, 앞으로도 그러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가을이다. 많은 문화행사들이 있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행사가 아니더라도, 가을의 자연이 산과 들과 바다에 풍성한 문화행사들을 마련하였다. 자연의 문화행사들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를 만나야 한다.
우주에서 우리는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자연이 주인이고 우리는 그 자연이 베푸는 조화의 질서에 속하여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한 질서에 대한 인식이 바탕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고의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이었는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지혜를 이 가을의 자연 속에서 깨달아, 우리 모두 미래를 예언하는 예술가가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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