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홍의 사랑으로 물들어 보았는가
아주 오랜 옛날 조물주가 처음 세상을 만드신 다음,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붙여 주실 때 작은 잿빛깔의 새를 만들고 ‘진홍가슴울새’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 새가 물었다.


“제 몸은 잿빛 털로만 덮여 있을 뿐인데 왜 ‘진홍가슴울새’라고 이름을 지어 주십니까?” 조물주가 대답했다.

“네 마음가짐 하나로 너는 빨간 날개 털을 받게 될 수 있단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어미새가 새끼들에게 진홍의 털을 얻으려다 죽어간 많은 조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중, 저쪽 언덕 위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의 이마에서는 핏방울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잿빛의 작은 어미새는 동정심 때문에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그 사람에게 포르르 날아갔다. 그 새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서 그의 이마에 박힌 가시 하나를 주둥이로 뽑았다. 그러자 십자가에 매달린 이의 이마에서 피 한방울이 어미새의 가슴 위에 떨어졌고, 그 순간 그분이 이렇게 속삭였다.


“너희 조상들이 세상 첫날부터 애써 구해 온 것을 너는 그 따뜻한 마음씨 하나로 기어이 얻어냈구나.”

어미새는 샘물에 몸을 닦았으나 진홍빛은 지워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 태어나는 모든 진홍가슴울새의 목과 가슴에도 진홍의 털이 빛나기 시작했다. 스웨덴 출신의 작가 라게를뢰프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가시관을 쓴 채 죽어 가는 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의 이마나 가슴에 박힌 가시를 빼 줘본 적이 있던가.
그래서 우리의 가슴이 진홍의 사랑으로 물들어 보았던가.


오래 전에 읽은 이 얘기가 다시 떠오른 것은, 엊그제 어버이날에 고등학생인 딸 은비가 손수 색종이로 만들어 내 가슴에 꽂아준 진홍빛 카네이션 때문이었다.

비록 조화 한 송이지만, 돈만 있으면 꽃집에서 사서 전할 수 있는 생화보다 더 소중한 느낌이 뭉클하게 전해져 왔다.


오늘 우리는 가정이 붕괴되는 위기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젊은 부부의 파탄뿐만 아니라 황혼에 이른 부부들조차 이혼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를 심심찮게 접한다.

어떤 시인의 표현처럼 ‘모래인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일까. 따스한 관심과 연민의 피가 돌지 않는 모래인간.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남과 더불어 사는 소통과 연대를 모르는 메마른 모래인간. 부부 사이든 부모와 자녀 사이든,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희생의 가치, 헌신의 가치를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린 모래인간.
이런 모래인간의 집합으로서는, 참된 행복의 둥우리를 틀 수 없다.
가정은 피가 돌지 않는 모래인간의 집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홍의 따스한 사랑을 가진 진홍가슴울새처럼, 붉은 카네이션처럼 가정엔 피가 돌아야 한다.

피의 순환, 이 말이 뜻하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으리라. 혹 이런 말뜻을 모르는 모래인간이 있다면, 그 메마른 심장에 진홍가슴울새의 이야기가 진홍의 피가 되어 스며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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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 진 하

■강원도 영월 출생

■감리교신학대학 및 대학원 졸업

■「세계의 문학」에 시인으로 등단.

■시집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등

■산문집 「영혼을 살아 있게 하는 50가지
방법」,「나무신부님과 누에성자」 등

■기독교문화포럼 대표.

■원주 문학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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