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온 누리가 봄빛으로 가득하다. 지난겨울 그 엄청난 한파와 폭설 속에서 우린 얼마나 봄이 오기를 기다렸던가. 그러나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듯 결코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삼동(三冬)의 모진 추위도 결국은 자연의 질서, 계절의 순환 원리 앞에 굴복하고 영겁의 시간 속으로 그 위세를 깊이 감춰버리고 말았다. 이제 세상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고운 자태를 뽐내며 피어나기 시작한다.


따사로운 봄햇살 속에서 지난겨울 동장군(冬將軍)이 준 혹독한 고통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과 벚꽃이 차례차례 피어나 갖가지 색채로써 자신의 존재를 세상 밖으로 드러낸다.


정말 이 세상엔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어느 노시인(老詩人)의 ‘하늘엔 별, 땅에는 꽃, 사람에겐 시’라는 말도 그만큼 꽃이 아름답기에 가능한 표현이 아닐까. 밤하늘이 별이 있어 아름답다면, 이 세상은 꽃이 있어 아름답고 인간은 시가 있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물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대중가요도 있지만, 그야 아직까지 꽃보다 더 아름다운 인간 삶을 체득하지 못한 필자로서는 남은 여생에서 반드시 깨쳐야 할 화두이겠지만, 무지한 범부(凡夫)인 필자가 과연 그것을 깨달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꽃도 피어나는 순서와 제 몫의 역할이 정해져 있는 듯하다.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과 벚꽃이 봄의 도래를 전하는 전령이라면, 조팝나무와 라일락, 산목련과 모란은 아마도 봄의 충만함을 온몸으로 노래하는 화신일 것이다.
이제 곧 오백나한(五百羅漢) 같은 조팝나무가 화사한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라일락과 산목련도 숨막힐 듯한 향기와 자태로 봄의 향연에 동참할 것이다. 등꽃은 또 얼마나 매혹적인가. 올 봄엔 또 그 자줏빛 꽃향기로 얼마나 필자의 가슴을 출렁이게 할 것인가.



내가 너의 그리움으로 남아 / 한평생 네 그늘이 될 수만 있다면, 아니 / 자줏빛 꽃향기로 네 곁을 떠돌 수만 있다면 / 설령 그곳이 내 무덤인들 어떠랴 // 어제는 진종일 바람이 불었고 /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졸시(拙詩) <등꽃> 전문
이 시는 몇 해 전 필자가 어느 학교에 근무할 때 교정의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퍼붓던 꽃향기에 취해 즉석에서 만든 작품이다.

작품의 완성도가 얼마나 되는지의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시는 필자가 쓴 게 아니라 등꽃 향기가 써 준 작품이라 해도 좋을 만큼 아주 쉽게 쓴 작품이다.
물론 이 시 한 편을 얻기 위해 봄철 내내 등나무 아래를 찾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봄의 아름다움을 채 구가하기도 전에 봄이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다. 4월 말, 절기상으로는 분명 봄날임에 틀림없지만,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니 과연 이런 날씨를 봄이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하기야 점점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게 우리의 세상살이요, 자연의 이치이겠지만, 이러한 급격한 계절의 변화도 결국은 우리가 자연을 파괴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것 역시 우리가 짊어져야 할 또 다른 고통이요 멍에일 것이다.
아아, 봄날이 간다. 봄이 왔음을 느낄 새도 없이 봄날이 간다.







양 승 준

(시인·원주농업고등학교 교사)

■1956년 춘천 출생

■춘천고, 강원대 국어교육학과및
상지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2년 제5회 <시와 시학> 신인상
당선으로 시단 데뷔

■1998년 제1회 <열린 시조> 신인상
당선으로 시조단 데뷔

■<북원문학상>및 <치악예술상>수상

■<시와 시학>동인, <오늘의 시조학회>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시집:<이웃은 차라리 없는 게 좋았다
>, <사랑, 내 그리운 최후>

■저서:<한국 현대시 400선 - 이해와
감상>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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