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1년 1월 원주전투가 끝난 뒤 원주 시가지. (사진: 데이비드 핼버스탬 저, 「콜디스트윈터」)

6월은 빨간 그림 그리는 달이다. 이르면 5월 말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늦어도 6월 둘째 주까지는 그림을 제출해야 한다. 반공 포스터이다. 필자보다 이른 시기에 학교에 다녔거나 70∼8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그려야 했던 그림이다. 그림과 함께 반공을 주제로 지은 표어도 제출해야 한다. 담임선생님에 따라 그림과 표어 모두 제출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제출하기도 했다. 모두 호국 보훈의 달 6월에 있었던 일이다.

반공 포스터 하면 지금도 뚜렷하게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과거에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불렀다. 우리와 전쟁을 벌였던 공산진영 사람들, 북한, 중국, 소련 사람들은 모두 빨간색으로 그렸다. 겪어보지도 않은 한국전쟁을 상상하며 국군이 북한군을 물리치는 내용이 그림의 주제였다. 필자와 대부분의 동년배들은 국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북한군을 그렸다. 그림 그리기에 재능이 없었던 필자는 북한 인민군을 빨갛게 칠하고 머리에서 흘리는 피를 파랗게 표현하곤 했다. 호국의 달 6월에 필자가 제출한 반공 포스터는 4학년 때부터 6학년 졸업할 때까지 빨간 피부에 파란 피를 흘리는 인민군이 그려져 있었다.

대한민국 땅 어디인들 전쟁의 상흔이 없는 곳 있겠는가마는 원주는 특히 전쟁의 상처가 깊은 도시이다. 한국전쟁 기간에 원주에서 벌어졌던 전투가 격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직접 전쟁을 겪지 않은 전후 세대이지만, 원주 시가지 전체가 포격으로 사라진 전쟁 직후 사진을 보면 원주에서의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짐작할만하다. 신라시대에 북원경, 조선시대에 강원감영 소재지였던 역사도시 원주이지만 전통가옥이라고 부르는 목조 건축물은 보기 어렵다. 심지어 동사무소와 면사무소가 한국전쟁 때 불에 타 호적과 토지대장이 소실되기도 했다고 한다. 역사 분야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원주는 도시 규모에 비해 다른 도시보다 오래된 기록물이 적은 편이라고 한다. 민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문서들이 전쟁기간에 불에 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73주년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도 70여 년 전의 전쟁을 대체로 가슴으로 이해하고 입으로 말한다. 최근에는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있기도 하다. 전쟁의 원인과 과정, 휴전을 학문적으로 분석한 연구자들과 그들의 연구 결과물이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출판되었지만, 우리 사회의 구성원, 특히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전쟁을 이성보다 감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전쟁사가와 저널리스트들은 1951년 1월과 2월 원주에서 벌어진 원주전투를 한국전쟁의 전환점이라고 평가한다.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미국인 J.D콜맨은 「Wonju, the Gettysburg of the Korean War(한국전쟁의 게티스버그, 원주」 라는 제목으로 원주전투에 대한 생생한 기록과 증언을 다큐멘터리 형태로 출간했다. 한국전쟁 당시 187공수연대 이등중사로 원주전투에 참가했던 J.D콜맨은 중공군의 전쟁개입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던 연합군이 전세를 역전하고 지금의 휴전선까지 회복할 수 있었던 계기가 원주전투라고 평가하고 있다. 

원주전투에 대한 또 다른 대중서로 미국인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The Coldest Winter(혹독하게 추운 겨울)」가 있다. 이 책은 핼버스탬의 마지막 저술인데 그는 이 책을 출간하고 퓰리쳐 상을 받았다. 핼버스탬 역시 원주전투를 한국전쟁 기간 동안 벌어진 수많은 전투 중 연합군에게 가장 중요한 전투로 인식하고 있다. 다음은 핼버스탬이 기술한 원주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장면이다.     

'2월 14일 아침에 섬강 위로 탄착 관측기가 날고 있었다. 원주의 서북쪽 산악 지역을 지나 정찰 중이었다. 제15야전포병대대 리 하텔(Lee Hartell) 중위는 관측기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특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강변에 눈에 띌 정도로 빽빽하게 나무가 서 있는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평소 이 지역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숲이 갑자기 생긴 것 같다고 느꼈다. 좀 더 자세히 내려다보니 그 나무들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제야 하텔은 그것이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가 아니라 거대한 중공군 부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워낙 위장이 뛰어나서 언뜻 보기에 숲처럼 보였던 것이다.' 수많은 중공군에게 수적으로 열세였던 미군은 포격으로 맞서 싸웠다.

155mm 곡사포 30문, 105mm 곡사포 100문을 보유하고 있던 미군은 엄청난 화력으로 중공군을 포격했다. 원주전투를 지휘했던 스튜어트 준장은 포탄이 동이 나면 일본의 연합군 사령부에서 지원받고, 포신이 뜨거워져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포탄을 쏟아부었다. 스튜어트는 "총이나 대포가 다 녹아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발포하라."하고 명령했다. 원주전투 결과 중공군 약 5,000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원주전투로 전세는 역전되었지만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원주 시가지에는 손으로 헤아릴 정도 의 적은 수의 건물밖에 남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아름다운 누각과 정자 같은 건축물뿐만 아니라 원주의 근대기에 형성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nmpr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