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11월 문을 연 원주역사박물관. 이 터는 1994년 최규하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해 매입했다

지난 6월 첫날 지방선거가 시행되었고 밤샘 개표를 통해 동틀 무렵 새로운 공직자들이 선출되었다. 1995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된 지방자치제도에 의하여 선출된 공직자들은 앞으로 4년 동안 지방 정부의 일을 위임받아 수고하게 된다.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 시작도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를 위한 지배 수단으로 시작되었으니 진정한 자치는 아니었다. 1949년 광복 이후 우리 정부에서 시작된 지방자치 또한 제도가 추구하는 원래의 목적과 방법에서 멀기는 마찬가지였다. 익숙하지 않은 민주제도와 청산하지 못한 식민의 유습에 더해 정권 획득을 위한 위정자들의 오염된 이데올로기도 올바른 자치제도 정착에 걸림돌이 되었다.

과거 중앙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실행했던 중앙집권 제도는 지방의 특성을 잘 살피지 못했다. 특정 지역에 공단을 배치하고 인구수에 따라 문화시설과 체육시설을 조성했다. 이 시설들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지역 연고주의가 배경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니 국가에서 선양하기로 결정한 인물이나 역사 유적 외에는 각 도시가 주체적으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살피기 어려웠다. 오랜 중앙집권 제도 아래에서 가치 있는 지방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빛을 발하지 못한 이유이다. 

지방자치제도의 강점이자 가치 있는 목표는 도시의 정체성을 살리고 도시의 주인공인 시민의 자부심을 고양하는 일이다. 이것은 지방의 사정을 잘 모르는 중앙정부의 관료들이 깊이 있게 다루기 어려웠던 일이기도 하다.

오래된 담론이지만 사람이 살기 좋은 명품도시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시민의 자부심을 꼽았다. 2000년대 초반 이런 결과를 끌어낸 이들은 인문학자들이 아니고 도시계획을 전공한 사람들이었다. 

20여 년 전의 담론이지만 아직도 그들의 결론은 유효하다. 오히려 글로벌 시대가 고도화되면서 지방 도시가 지닌 고유의 가치는 도시와 국가의 주요 경쟁력이 되었다. 나이와 소득의 많고 적음을 떠나 공동체의 구성원인 시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자부심은 도시의 역사와 문화유산에서 비롯된다. 가정에서 자녀들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하여 '뼈대 있는 집'을 강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시민의 자부심의 근원인 도시역사와 문화의 집약체는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시민의 자부심을 키워주는 온상일 뿐만 아니라 외지인에게는 품격있는 도시안내서이다. 시대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박물관이 도시의 얼굴이자 품격이라는 것에 이견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이유로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여러 도시에서는 다투어 도시역사박물관 설립에 힘썼다. 

이러한 사실은 1995년 이후 각 도시에 세워진 공립박물관 건립 추세를 살펴보아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지방자치제도가 시작되던 1995년 19개소(국립박물관 17)에 불과했던 지방의 공립박물관은 10년 뒤 2005년에는 108개소(국립박물관 31)로 증가했고, 2021년까지 381개소(국립 51)로 증가하였다.

박물관 숫자뿐만 아니라 박물관의 규모와 질적 수준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첨단과학과 예술적 감각을 동원한 전시기법으로 관람객들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여러 도시에서 지방자치제도의 강점을 살려 시민의 자부심을 높이고자 노력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선거가 끝나고 원주의 한 당선인은 '원주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가 말하는 원주의 자존심 회복이 도시 규모의 확장보다 원주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살피는 일이 우선되길 바란다. 필자는 공직 대부분을 박물관에서 일했다. 2008년부터 원주의 도시 기원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가현동 유적(옛 국군병원 터)에 사적공원을 조성하고 박물관을 이전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이루지 못했다.

현직에서 떠날 때까지 필자가 만났던 사람들 대부분은 도시 변두리 주택가에 자리 잡은 원주박물관의 규모와 위치를 보고 실망에 찬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원주가 강원도 대표도시 아닌가요!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은 새롭게 선출된 공직자들의 몫이다. 

박종수 전 원주시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