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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을 탐사한 사람들

이상갑 벨라시티 경로당 회장l승인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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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강은 언제부터 흘렀을까? 지구가 생기고 산과 들과 강이 생긴 그 때부터? 단군조선이 건립된 시기 훨씬 이전부터 남한강은 유유히 흘렀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남한강을 수로로 사용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고 고려시대에는 한강 하류에서 예성강을 경유, 해주에서 개성으로 세곡을 운송했다고 한다. 거리가 멀고 운항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그 수나 양이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4년 수도를 서울로 옮기고 난 후 남한강 권역 원주 흥원창과 충주 가흥창에서 세곡을 운송하게 되었다.

 남한강을 탐사한 역사적 인물은 누가 있을까? 먼저 조선 개국공신인 하륜(1367∼1416)이 남한강을 탐사한 기록이 있다. 단종(1441∼1457)은 남한강을 탐사한 것이 아니라 유배길이었다. 1457년 6월 22일(음력) 서울 영도교에서 정순왕후와 이별한 후 광진구 광장동 광나루에서 승선해 여주 이포나루와 어수정을 경유, 원주 흥원창에서 하선했다. 부론면 단강리에서 귀래와 신림, 싸리치, 송계리, 요선정 등을 거쳐 6월 27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5박 6일이 걸렸다. 가는 곳마다 마을 주민들이 한없는 눈물로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학자 이황(1501∼1570)은 1548년 단양 풍기군수 재임 시절 단양 8경을 지정하고 시문을 남겼다.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1517∼1578)과 문신 박환(1584∼1671)도 남한강을 탐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윤선도(1587∼1671)는 1664년 사군산수(청풍, 제천, 단양, 영춘)를 유람하고 시를 지었다.

 김창흡(1653∼1722)은 진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68년 덕소에서 영월까지 탐사하면서 1개월간 '단구일기'를 기록했다. 단양에 있는 도담삼봉은 김창흡이 단구 삼봉으로 지칭한 곳이다. 

 당시 단구 역참은 현재 단구동 동주아파터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김창흡이야말로 남한강을 최초로 제대로 탐사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전국을 탐사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사군신수기를 기록한 서예가 이만부(1664∼1732), 화가 정선(1676∼1759)과 김홍도(1745∼?), 실학자 성해응(1760∼1839)과 정약용(1762∼1836), '옥순봉도'를 남긴 윤제홍(1764∼?), 서화가 김정희, 안숙(1761∼1815) 등이 있다. 

 남한강 탐사 기록이 남아있는 인물 중에는 외국인도 있다. 여행가이자 작가, 지리학자인 영국 귀족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1)이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세계 각지를 여행 중에 우리나라에 약 4년간 머물렀다. 1894년 한양에서 영월까지 당시 176개 마을을 지나면서 남한강을 탐사한 후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걸작을 남기기도 했다. 

 그녀와 함께 나룻배에 탑승한 인원은 6명이다. 이사벨라 본인, 밀리 선교사(1866∼1937), 이체온(밀리 선교사 비서), 중국인 통역사 왕 씨, 뱃사공 김 씨, 김 씨의 조수 등이었다. 이사벨라는 배에 계속 머문 것이 아니고 하선하여 주변을 돌아보며 기록하고 숙식을 해결하는 일정을 가졌다. 상행시에는 하행시 보다 2∼3배 시간이 더 걸렸다.

 상류로 갈 때 수심이 얕은 곳은 밧줄에 배를 묶어 끌고 가야 했으므로 힘들었다고 한다. 영월, 제천, 단양 등지의 감입곡류(嵌入曲流) 때문에 유속이 빠른 곳에서 배가 바위에 부딪혀 배가 파손되고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도 있어 배를 정박해 수리를 한 뒤 다시 출발하기도 했다. 통상 하루 11∼16㎞를 여행할 수 있었으며, 유속이 빠른 곳은 1일 40㎞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한다. 

 1972년 팔당댐 건설과 그 이후 각종 보(堡) 건설 등으로 인해 서울에서 단양 영춘까지 수로 여행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하천에 적합한 수륙양용차를 개발해 남한강 유람코스를 만들어 조선시대 관료층, 시인, 묵객 등의 낭만을 음미해 본다면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남한강을 다녀간 사람 모두를 정리한 것은 아니다. 기록상으로는 양반 계층의 탐사뿐이지만 기록 없는 민중들의 부분적인 탐사가 무수히 많았을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아직도 많은 자료들이 연구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상갑 벨라시티 경로당 회장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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