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래면 미륵산 바위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상.

귀래면 미륵산 마애불은 1990년대 원주여고에서 아이들과 답사하면서 처음 만났다. 등산로가 지금처럼 정비되지 않았던 터라 마애불 아래 서서 올려다보면 제대로 보이는 건 미륵불 코 정도였다. 수직 바위 절벽에 새긴 마애불이니 그럴 수밖에. 지금은 철제 계단과 나무 데크로 정비되어 측면에서 마애불 전체를 올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미륵산 마애불에는 신라 경순왕의 자취가 전해진다. 경순왕이 이곳에 머물면서 마애불을 새겼다고도 하고 경순왕의 딸 덕주 공주가 아버지 형상을 새겼다고도 전한다. 경순왕은 천년 사직을 왕건에게 넘겨준 대가로 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경주의 지배권을 인정받아 사심관이 되었다.

귀래면 일대에는 경순왕과 관련된 자취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원주지명총람에 의하면 귀래에서 경순왕이 43년간 머물면서 미륵산 정상 바위 절벽에 거대한 미륵불상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미륵불상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학수사란 절이 세워지고 미륵불상 아래 고자암이라는 암자도 건립되었다고 한다. 천년 사직을 망쳐버린 한을 안고 삼베옷 입고 금강산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는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도 충북 중원에 미륵세계사를 짓고 미륵불상을 봉안하였고, 딸인 덕주 공주도 제천에 덕주사를 짓고 미륵불상을 모셨다고 전한다.

이후 이 지역 지명이 경순왕이 오신 마을이란 뜻으로 귀래로 바뀌었다고 한다. 미륵불상 조성 과정에서 세워졌던 학수사와 고자암은 후에 황산사란 사찰로 중창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황산사는 흐르는 세월과 불교의 성쇠에 따라 쇠락과 중창이 반복되었다. 현재 황산사 터에는 삼층석탑 정도만 남아 있다.

43년간 귀래 머문 경순왕이 조성했다고 전해져
미륵신앙 난세에 확산 망국의 군주 연민의식도

▲ 마애불상이 새겨진 바위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쇠락한 왕조의 왕, 왕자, 공주였던 이들이 미륵불상에 매달려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망국에 대한 회한과 떠나버린 왕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만백성을 보듬어 살피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경순왕이 살았던 시기 미륵 신앙과 관련된 인물로 궁예가 있다. 궁예는 탐관오리의 수탈과 지배층의 횡포에 신음하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주겠다며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며 세력을 확대했다. 하지만 왕건 세력에 밀려나고 말았다. 

미륵 신앙은 난세에 확산되었다. 지배층의 수탈과 차별에 짓눌려 사람답게 살기 어려운 시대, 백성들은 저마다의 마음속에 수탈도 차별도 없는 새로운 세상을 담고 살았다. 궁예, 경순왕, 왕건이 살았던 시기도 그랬다. 백성들의 마음에 담긴 새 세상에 대한 꿈을 궁예는 현실로 끌어내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만들려 했고, 경순왕은 망국의 군주라는 연민 의식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궁예와 경순왕을 굴복시킨 고려 왕조는 백성들의 염원을 담고 있던 미륵 신앙보다는 왕실과 권력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줄 불교가 필요했다. 법천사 지광국사, 거돈사 원공국사가 그 역할에 충실했던 대표적 인물들이었고,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는 그 자취와 흔적을 담고 남아 전해지는 폐사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