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1월 말, 4년여 공들여 진행해온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극장>(김영미 글/최용호 그림)이 나왔다. 이 그림책의 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은 전라남도 광주에 실재하는 광주극장, 1935년 일제 강점기 조선인 자본에 의해 문화공간으로 건립되어 영화와 연극·판소리·창극은 물론 1945년 해방 기념 축하 대공연·조선건국 준비 위원회 전라남도 위원회 결성식·1946년 모스크바 3상 회의 지지 대회,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의 연설, 일본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문춘성 선수의 시범 권투 경기, 최승희·이매방의 춤사위, 전국 학생 연극제 등 근대 역사와 문화의 기념비적 순간이 펼쳐졌던 곳이다.

 1968년 큰 화재로 주춧돌만 남기고 전소되었으나 극장의 원형을 살려 재건축, 컬러텔레비전과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득세를 이겨내고 예술전용극장으로 알차게 운영되고 있다.

 이 그림책 작업을 진행하느라 짧지 않은 기간, 거의 매달 원주와 광주를 오갔던 강행군의 이유를 물으면 짐짓 말을 더듬게 된다. 남도 강연 길에 우연히 들른 극장에서 그가 쏟아내는 이야기에 사로잡혔다고 말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눈치채셨겠지만, 필자는 감수성을 자극하고 정서가 발현되는 극장·도서관·박물관·미술관·음악당을 비롯한 모든 공간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여긴다. 20년 전 땅 기운에 끌려 원주로 이주했으나 미처 영화표를 쥐고 좌석에 앉아볼 새 없었던 아카데미극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극장에 대한 이런 감각을 작가적 판타지라고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사회학자 위경혜가 <한국의 극장>에서 정의하는 바와 결코 다르지 않다. '극장은 일상생활 속 사회구성원과 소통하면서, 그 의미를 생산하고 재구성한다. 사회구성원인 지역민이자 관객은 그들의 구체적 활동을 수행하면서 특정 물리적 공간에 각자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카데미극장 또한 근대역사문화공간재생활성화확산사업 선정이라는 보존 가치 경쟁에서 두 번이나 탈락된 민망한 건물이라기보다 지역 공동체 구성원의 문화 향유 기억과 경험을 품고 있는 기념비적인 유기체이며, 원주 문화 정체성의 일부를 구성하는 지역 대중문화 자산이다.

 한물간 극장 이야기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 놀라운 반전 결말로 이름난 자닌 테송의 소설 <뤽스 극장의 연인> 또한 이렇게 시작된다. '뤽스 극장은 누가 봐도 완전히 한물간 영화관이다.' 이 극장의 사장 겸 매표원 겸 안내원 겸 영사기사인 피오 씨는 스스로 저급영화라고 폄하하는 상업영화를 올려 근근이 운영비를 감당하지만, 수요일 저녁이면 나비 넥타이를 매고 두 눈을 빛낸다.

 그 하루, 여섯 시와 아홉 시 두 번에 걸쳐 자신이 좋아하는 위대한 작품을 틀어 '진정한 영화의 영광을 기리는 데' 바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간이면 단관극장 뤽스극장은 '추억을 만나러 온 나이 지긋한 어른들과 낡아빠진 벨벳 의자에 기댄 채 과거로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젊은이들로 절반쯤 채워진다.'

 아카데미극장을 소환해낸 순정한 열정의 흐름에 갈채를 보내며, 그가 '영화의 영광을 기리'고(극장), 원주 문화공동체의 역사를 만져보면서(극장박물관), 세상 모든 극장 이야기를 즐기는(극장 도서관) 지역 공동체의 다정하고 다재다능한 문화 거점이 될 날을 기다린다. 그런 만큼 그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묻고 답하는 일이 풍성해져야겠다.

 문화연구가 이동연이 도시 재생에 문화와 예술이 주요 수단과 방법이 된 지 오래라면서 강조한 전략-'기존의 물리적 공간과 역사적 유산은 가급적 훼손하지 않고 재생해 사용하면서 새로운 창의적 자원을 기획해 도시의 경제 기능을 활성화하는 것'(<예술@사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새로운 창의적 공동체>의 저자 알린 골드바드가 짚어낸 공동체 문화 개발의 목표- '최대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리하여 스스로의 자원들을, 만인을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환경을 창조하는 데 기여하기'도 담론의 좋은 지표가 될 것이다.

 유네스코창의도시네트워크UCCN https://en.unesco.org/creative-cities/home의 오늘자 최신 뉴스는 유네스코미디어예술창의도시 덴마크 비보Viborg의 글로벌 소셜 미디어 캠페인-COVID19 상황의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 공유- 소식이다. 언제쯤 이 자리에서 유네스코문학창의도시 원주의 아카데미극장 이야기를 보게 될까? 그림책 <아카데미극장 이야기> 출간 소식도 보게 될까? 네트워크 도시에 단관극장 이야기를 공모해 아카데미극장에서 스토리텔링 파티를 벌이면 어떨까?

이상희 그림책 시인, 그림책도시 이사장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