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31일 남산재개발지구 화재 모습

노숙인, 추위 이기려 석유 난로 사용…발화 원인 추정 
73세 필리핀 할머니 7·9세 손자손녀 일가족 3명 참사 
소화전, 현장과 10m 떨어져 있지만 녹슬어 사용 불가

원동남산재개발지구에서 불이나 3명이 죽고 2명이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원주소방서에 따르면 지난 31일 새벽3시경 명륜동 추월대길 42번지 일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필리핀 출신 73세 할머니와 9살 손녀, 7세 손자가 목숨을 잃었다. 숨진 아이들의 어머니(32·필리핀)와 불을 낸 것으로 추정되는 김모(65) 씨는 주민들 도움으로 생명을 건졌다. 

고지대이고 소방차 진입이 어려워 화마는 1시간 20여 분만에 진압됐다. 건물 두 채가 전소됐고 주변 건물에도 피해를 줬다. 이웃 주민 A 씨는 "새벽에 바람소리가 요란해 잠을 깨어보니 옆집에 불이 크게 일었다"며 "'쾅' 부탄가스 터지는 소리가 여러 차례 나더니 화마가 순식간에 집을 덮쳤다"고 말했다. 

지난 1일 경찰과 국과수, 소방당국 등은 화재 원인을 밝히기 위해 현장합동점검에 나섰다. 관계 당국은 난방기구 사용 부주의로 화재가 난 것으로 추정했다. 노숙인 김모 씨가 추위를 이기려 석유 난로를 사용했고, 취침 중 불이 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원인은 한 달 뒤에나 나올 예정이다.

▲ 경찰과 소방당국, 국과수는 지난 1일 현장합동점검에 나섰다.

지역사회 무관심, 사람 목숨까지 앗아가
사건의 발단은 노숙인 김모 씨가 제공했다. 하지만 지역사회 무관심이 키운 예고된 화재이기도 했다. 김모 씨는 태백 출신으로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람이다. 원주에 온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몇 해 전부터 남산 달동네 빈집에서 거주했다. 

이웃들 진술에 의하면 수도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술로 지새우는 경우가 많았다. 물은 이웃에게 양해를 구해 페트병에 담아 음용했고, 전기는 들어오지 않아 석유 난로를 의지하며 추위를 견뎠다. 빈집에서 수년 동안 노숙 생활로 연명했지만, 행정의 손길은 좀처럼 닿지 않았다.

주민 B 씨는 "달동네다보니 김 씨와 같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많이 거주한다"며 "이들을 보호하거나 도와주기 위해 공무원이 찾아온 적은 없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원주시가 빈집 조사나 노숙인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섰어도 사건이 이렇게 커지진 않았을 것이라 지적했다.

▲ 화재현장과 소화전은 불과 10m 거리에 있었지만 관리가 안 돼 사용이 불가능했다.

소화전 관리도 엉망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불이 난 지점은 달동네로 소방차가 진입할 수 없는 지역이다. 재개발정비구역으로 지정됐지만, 사업이 진행되지 않아 도로 확보가 안 됐기 때문. 골목길을 따라 고지대로 올라가면 20여 채에 달하는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불이 나면 대형 화재로 번질 가능성이 커 원주소방서는 소화전을 운용했다. 하지만 이도 실제 화재 현장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주민 B 씨는 "소화전이 바로 10m 인근에 있었는데 소화관 자체가 얼어붙고 녹슬어 사용이 불가능했다"며 "불이 크게 나고 사람이 죽은 후에야 당국이 와서 소화전을 관리했다"고 말했다.

▲ 남산재개발지구 화재 발생 현장. 집 두 채가 전소되고 주변 가구에도 피해가 발생했다.

결혼이민 가정 한국에서 참변
숨진 필리핀 할머니와 손자·손녀는 다문화 가족 구성원이다. 할머니는 3년 전 딸의 초청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사부인과 한집에서 지낼 때만 해도 건강이 좋았으나 지난해 사망하면서 육아 부담이 커졌다. 

할머니는 매일 밥상공동체종합사회복지관을 찾았다. 다리를 절며 20~30분 거리를 걸어 도시락을 타곤 했다. 자신 몫으로 지급된 도시락은 1인분이었지만 어린 손주들과 나눠 먹으며 가난을 견뎠다. 

설상가상으로 플라스틱 공장에 다니던 딸도 코로나19로 최근 실직했다.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체류해 돌봄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이웃들은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주민 B 씨는 "아이들이 맑고 귀여웠는데 참변을 다해 가슴이 먹먹하다"며 "머나먼 타국에서 끔찍한 일을 당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편, 숨진 아이들의 어머니는 이튿날 병원에서야 두 자녀와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화재 당일 연기를 들이마셔 의식을 잃었기 때문. 중국에 있는 남편이 다음날 전화로 비보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다니엘 기자  nice4s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