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9년 인천 금곡동에서 거주할 당시 고 박경리 선생 가족사진.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경리 선생, 남편 김행도 씨, 박경리 선생 모친 김용수 씨, 아들 김철수, 딸 김영주 전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일본유학 당시 민족의식 고취 '친교회' 조직 옥고

대문호 고 박경리(1926~2008) 선생의 배우자인 고 김행도(1923~1950) 씨가 항일운동에 앞장선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국가보훈처는 김 씨를 제75주년 광복절 기념 독립유공자로 선정하고, 지난 3일 외손자인 김세희 토지문화관장에게 서훈(대통령표창)을 전달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김 씨는 일본 부산현 고강공예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2년 3월 일본인 교사와 학생들이 조선인을 멸시하고 차별대우하는 것에 맞서 '친교회'를 조직했다. 민족의식을 첨예화하고 조선 독립을 지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동지들을 규합해 민족의식 고취 등의 활동을 펼친 김 씨는 1944년 3월 일제에 검거돼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실제 7개월 23일간 옥고를 치렀다. 국가보훈처는 1979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3: 재일본한국인민족운동자료집'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냈고, 그 엄혹한 시기를 대하소설 '토지' 등으로 풀어낸 고 박경리 선생도 생전 "일본인에게 예 차리지 말라"며 일제에 대한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소설 '토지'와 '일본산고(日本散考)' 등 선생이 남긴 여러 글에서도 일본과 일제강점기에 대한 선생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2008년 타계 후 고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공개한 원고지 148매 분량의 '일본산고(日本散考)'에서 선생은 "일본의 역사왜곡은 고래심줄 같은 몰염치"라거나 "일본인에게는 예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라며 준엄하게 꾸짖었다. 일본 땅에서 항일운동에 앞장 선 남편 김 씨의 삶의 궤적과도 닮아 있는 부분이다.  

▲ 지난 3일 토지문화관을 방문한 황후연 경기북부보훈지청장이 김세희 토지문화관장(왼쪽)에게 외할아버지 김행도 씨의 서훈을 전달하고 있다.

'박경리'란 이름의 유명세와 비교하면 그동안 배우자 김 씨에 대해서는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6.25 당시 행방불명 됐다는 것 외에 크게 알려진 이야기가 없었다. 유족과 토지문화관에 따르면 박경리(본명 박금이) 선생은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집안에서 선을 보게 해 김 씨와 결혼했다. 1948년 김 씨가 인천 전매국에 취직해 인천 금곡동으로 이사했으며, 집 가까운 곳에서 잠시 헌책방을 운영했다. 박 선생은 훗날 이곳에서 2년 가까이 생활한 것을 두고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후 1949년 서울 흑석동으로 이사해 수도여자사범대학교(현 세종대학교) 가정과를 다녔으며, 1950년 졸업 후에는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에서 6개월 간 교사로 근무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남편이 있는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 온 직후 남편 김 씨가 부역 혐의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자 박 선생은 아이 둘을 데리고 형무소를 드나들며 옥바라지를 했다. 하지만 형무소에 수감된 김 씨가 행방불명이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소식을 알 수 없자 남편이 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고향 통영으로 돌아간 것으로 전해진다.

김세희 토지문화관장은 "외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돌아가신 외할머니(박경리 선생)나 어머니(김영주 전 토지문화재단 이사장)로부터 더 이상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면서 "아직 구체적인 사실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행방불명으로만 알고 있던 외할아버지의 행적과 기일까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무척 반가운 일"이라고 했다.

지난 3일 토지문화관을 찾아 김 관장에게 대통령표창을 대리 전달한 황후연 경기북부보훈지청장은 "국가보훈처 사료발굴단 조사를 통해 고인의 수형기록 등 관련 자료가 확인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보훈처에서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후 유족을 수소문하다 박경리 선생의 배우자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관장은 "'일본산고' 등 남기신 여러 글에서 항일의 견해를 피력한 할머니뿐만 아니라 행적을 알 수 없었던 할아버지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셨다는 사실이 한없이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