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했던 장마의 끝이 보인다. 50여 일이라는 최장기간을 기록한 올해 장마는 여름휴가마저 앗아간 채 끝도 없이 쏟아지더니 집안 곳곳에 곰팡이를 남긴 채 떠날 채비를 한다.

 장마 내내 가장 큰 골칫거리는 곰팡이였다. 높은 습도가 지속되다 보니 매일 에어컨을 켜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습기는 습기를 없애며 덩달아 온도마저 높여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과일에도 벽지에도 한 두 개 씩 핀 곰팡이를 발견할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문질러 지웠다. 곰팡이의 가장 큰 횡포는 아끼던 가죽 자켓에서 발견됐다. 제때 통풍하지 못한 가죽 자켓에 푸릇푸릇 돋아난 곰팡이를 보며 행거 전체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우연히 외할머니의 양털조끼를 발견했다. 중학교 때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꽤 멋쟁이셨다. 시골 촌동네 할머니지만 옷 고르는 취향이 무척 세련돼 난 할머니 옷을 좋아했다. 나의 할머니 옷에 대한 사랑을 알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엄마와 이모들이 이 조끼를 내가 가질 수 있게 해주셨다. 그렇게 좋아했던 조끼를 몇 년간 잊고 지내다 곰팡이 덕분에 다시 조우했다.

 자연스럽게 비오던 날 할머니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화분 가꾸기를 좋아하시던 할머니는 비내리는 날이면 집안에 있던 화분들을 모두 밖으로 꺼내 비를 맞게 했다. 크고 작은 화분을 함께 장독대로 옮기다 옷이 젖으면 물장난을 쳤다. 흠뻑 젖은 몸을 씻고 마루에 앉아 있으면 할머니는 금방 쪄낸 옥수수를 주며 파래진 입술을 문질러 주셨다.

 오래된 기억을 회상하다 문득 집에서 죽어가던 화분이 생각났다. 지인이 준 이름 모를 화분은 윤기 나는 푸른 이파리가 매력적인 식물이었다. 꼬박꼬박 물을 주며 가꾸자 흰 꽃까지 피워냈는데 그 뒤로 시름시름 앓더니 이파리를 우수수 떨궈낸 채 앓는 중이었다.

 비가 오면 며칠 동안이고 화분을 밖에 두고 비를 흠뻑 맞췄던 할머니처럼 이 아이에게도 마지막 처방으로 비를 내려야겠다. 화분을 들고 장맛비가 쏟아지는 마당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물이라도 실컷 마셔라. 그렇게 일주일쯤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았을까. 시들한 가지 사이로 작고 연한 이파리가 돋아난 게 보였다. 영양제 몇 통을 꽂아줘도 비실거리더니 고작 비 좀 맞았다고 다시 생생해진 모습이 기특했다.

 항상 우중충한 날이 계속되는 장마철이면 기분마저 축 쳐져 좋은 기억이라곤 없었다. 특히나 길었던 올해 장마는 더욱 우울감이 크고 지겨웠다. 하지만 장마 끝자락에 생각해보니 장마가 불쾌감만 잔뜩 주고 가는 건 아닌 것 같다. 잊고 지냈던 할머니의 양털조끼를 꺼내줬으며, 할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덕분에 죽어가던 화분도 살려냈다. 곰팡이 때문에 집안 곳곳을 대청소한 건 덤이다. 지겹기만 하던 장마에 올해 새로운 추억을 더했다. 장마 후 다가오는 늦더위도 걱정이 앞서지만 그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미뤄놨던 이불 빨래를 실컷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