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을 삶는다. 여름 소낙비와 젖지 않는 꽃잎의 이야기를, 구름의 족적까지도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는 팥을 삶는다. 팥이 한소끔 끓어오르자 옹골차게 모아온 계절의 내력을 그만 풀어달라고 찬물 한 종지를 재빨리 부어준다. 세 차례의 물세례를 받고서야 몸을 느슨하게 풀어놓는 팥알들은 돌돌돌 구르는 소리도 죽이고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어줄 준비를 완료한다.
 

 동짓날은 아직 며칠 더 있어야하지만 팥죽 한 사발 끓여 먹고 기운을 차려야겠다. 가을을 비실비실 보내며 소홀했던 일들을 알뜰히 챙겨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마무리해야겠다.
 

 나의 팥죽 사랑은 한 동안 잊고 있었지만 몇 해 전에 다시 시작됐다. 병원을 다녀와도 기침이나 재채기가 멎지 않고, 편도가 부어올라 목 넘김도 불편하고, 약간의 미열로 한 달 이상을 늘 피곤한 몸으로 약을 먹으며 지내고 있었다. 가깝게 지내는 문우가 "우쭈쭈, 아파서 어쩌니."를 몇 번 보내더니 그해 동지 무렵에 팥죽을 끓여가지고 방문을 했다.

 부스스한 몸으로 팥죽 한 통을 선물로 받아놓고, 입맛도 잃고 움직이기도 귀찮고 하여 연이틀을 팥죽으로 끼니를 해결했더니 감기증세가 신통하게도 말끔해지는 것이 아닌가. 팥과 함께 고아낸 사랑 덕분인지도 모르겠지만.
 

 하여 몸이 좀 피로해졌다 싶으면 계절 상관없이 팥죽을 자주 끓여 먹는다. 본래 팥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팥죽을 먹고 감기가 나았던 기억, 그리고 팥죽을 두어 끼니 먹고 나면 몸이 가벼워지는 현상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제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하는 잊혀져가는 세시풍속이 되어버렸지만, 동짓날 팥죽을 쑤어 온 가족이 따뜻한 저녁을 나누던 때가 있었다. 예전에는 주방시설의 불편함이나, 팥을 삶고 거르는 모든 과정이 번거로워 어머니는 많은 양의 팥죽을 무쇠 솥에다 끓이셨다. 동짓날 먹고 남은 팥죽을 오지동이에 담아 짚으로 엮은 뚜껑을 덮어 장독대에 보관하면 우리 자매들은 며칠 동안 들며날며 간식으로 먹었었다. 살짝 얼은 팥죽이 작은 냄비에 담겨서 화롯불에서 보글보글 끓으면 먹기 전에 먼저 침이 꼴깍 넘어가던 기억들.  
 

 동짓날 팥죽을 쑤게 된 유래는 중국 양쯔강 중류지역인 형초지방의 세시풍속을 담은 『형초세시기』에 나온다. 옛날 중국에 물을 관장하는 신(神) 공공이 있었다. 그의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전염병을 옮기는 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동짓날이 되면 공공의 아들이 가장 싫어한 팥으로 죽을 쑤어 집안 요소요소에 놓아두고, 팥죽을 먹으며 귀신을 쫓았다는 풍습에서 비롯되어, 우리 조상들도 동짓날 팥죽을 쒀 잡귀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여기저기 뿌리기도 하고 동짓날이면 꼭 팥죽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토속신앙의 주술적 행위가 아니더라도 팥은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올리고당 성분이 풍부해서 장운동의 활성화를 돕고,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몸 안 독소를 배출해주고, 피로감 개선이나 활성산소를 제거해 주는 등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동지는 음력 11월 26일(양력 12월 22일) '노동지(老冬至)'다. 애동지에는 팥죽을 안 끓이고 중동지나 노동지에는 팥죽을 끓여서 나눈다고 한다. 아마도 올해는 집집이 팥죽을 끓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팥죽 끓이는 냄새가 아파트 계단을 타고 구수하게 오르내리면서 모든 잡귀와 잡병을 몰아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추억어린 음식으로 동짓날 긴긴 밤이 따뜻해지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영희 원주문협 사무국장 시인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