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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지당 얼 선양 문예작품 공모전 일반부 장원 수상작

모든 생명은 존재 이유가 있다 이상용 원주시 늘품로l승인2019.07.08l수정2019.07.0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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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 찬거리는 집 앞 봉천내에서 장만했습니다. 이른 새벽 냇가에 지천으로 널린 미나리를 뜯었습니다. 이곳 미나리는 화수분 같습니다. 뜯어도 뜯어도 계속 자랍니다. 이슬이 마르기 전 뜯는 미나리는 잘 벼린 낫으로 싱싱한 수숫대를 가르는 것처럼 서걱서걱합니다.

 무딘 칼날에도 똑똑 뜯깁니다. 용암처럼 펄펄 끓는 물에 아주 살짝 데치고, 소금을 한 꼬집 친 뒤, 들기름에 조물조물 무친 미나리는 아침상에서 게눈 감추듯 사라집니다. 먹는 게 늘 전쟁이지만 이럴 땐 우쭐합니다.
 

 미나리를 뜯으며 당신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남의 눈을 피해 첫새벽이나 깊은 밤, 당신과 거닐던 곳입니다. 슬며시 잡던 당신 손의 온기는 아직 생생한데, 당신은 곁에 없습니다.

 반백 년 세월도 그리움은 당해내질 못합니다. 당신에게 시집와 이곳 원주에서 살 비비고 산 건 고작 8년인데, 사무치게 보고 싶습니다. 바늘로 심장을 콕콕 찌르는 고행입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19살로 돌아가 당신과의 8년을 80년처럼 살아보고 싶습니다. 남 눈치 안 보고 살렵니다. 당신에게서 삼보 이상 멀어지지 않을 겁니다. 양반 도리에 어긋난다고 손가락질 당하더라도 정녕 그렇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랬지요,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무의미하다고. 이도 저도 아닌 것처럼 찰나의 이동일 뿐이라고. 이런 말도 했지요, 현세에 덕을 쌓으라고. 서책을 놓지 말라고. 저승 입구에서 후회하지 않도록 살라고. 여자라고 아궁이 앞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저승에서 재회할 때 떳떳할 수 있는 생을 살라고. 몸져누운 보료 머리맡에 앉은 저에게 당신이 마지막으로 건넨 말입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저고리에 고개를 처박고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때는 한 구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이 하얗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그때 제 나이 스물일곱이었습니다.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을 보내고 한동안 손에 물 마를 새 없을 정도로 집안일에 집착했습니다. 대청마루가 닳도록 걸레를 훔쳤습니다. 제가 집에 없으면 응당 봉천내 빨래터로 찾아올 정도로 방망이질을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당신 채취가 서려 있는 보료를 태울 수 없어 농짝 깊숙이 숨겨두고, 휘영청 달이 밝은 밤이면 당신인 양 보듬고 잤습니다. 그런 밤 소쩍새 울음소리는 왜 그리 구슬프던지…. 대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에 방문을 열어젖힌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올 리 없는 당신을 기다리는 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침잠과도 같은 수렁의 시간에서 저를 일으켜 세운 건 당신 말대로 서책이었습니다. 친정처럼 시댁에서도 학풍을 중시한 덕분이었습니다. 서책을 읽다 보면 봄볕이 대청마루로 아장아장 걸어오는 시간의 흐름이 읽힙니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때면 시야가 흐릿해져 서책을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몸을 일으켜 뒤뜰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곳에는 작디작은 오랑캐꽃부터 쐐기풀, 애기똥풀, 민들레 등등 생명의 환희가 저녁노을인 양 불타고 있습니다. 추녀에 집을 지은 거미는 가만히 몸을 웅크린 채 저녁상을 기다립니다. 다시 생기가 돋습니다.
 

 모든 생명은 태어난 이유가 있다는 걸 그네들을 보며 생각해봅니다. 떠나는 시점은 다르지만 이승에서의 존재 이유는 제각각 간직하고 있겠지요. 생명의 소중함입니다. 당신의 유언은 그 가르침을 알려주려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렇게 조그만 보랏빛의 오랑캐꽃이 우리 집 뒤뜰에 뿌리내린 이유가 있는 겁니다. 애기똥풀이 노란 진물을 뱉어내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하물며 당신의 아내인 제가 삶의 연유를 모른 채 저승을 맞닥뜨린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저승에서 당신을 뵐 면목이 없겠지요.
 

 온갖 서책에서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가치는 인류애였습니다. 비단 사람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찾아온 모든 생명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을 깨닫는 데 일평생이 걸렸습니다. 그나마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다른 여인네들은 여전히 아궁이 앞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걷고 있는 이 길이 후대 여인들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발목에 힘주어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꾸 어깨가 늘어지는 게 저에게 부여된 이승의 시간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한편으론 당신에게 도달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겠지요. 이승의 시간 동안은 이승에서의 사랑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미나리 뜯을 때 참 모질게 달려들던 거머리와 벼름빡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돈벌레까지도 사랑하겠습니다.

 존재 이유를 상기하면서 말이지요. 바람과 구름, 시간과 모든 흔적을 사랑하겠습니다. 제게 남은 사랑이 쭉정이가 되도록 이 세상과 질펀하게 사랑한 뒤 당신에게로 가겠습니다. 그곳에서 만날 당신에게 이승에서 한껏 놀고 왔다고 넋두리 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하겠습니다. 그것이 당신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점점 눈이 희미해집니다. 희미해질수록 당신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우리 만날 날, 멀지 않았지요?

 당신의 아내 임윤지당 올림


이상용 원주시 늘품로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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