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깎이 화가 이인숙(84) 씨는 "언제까지 될지는 모르지만 남은 여생도 그림과 함께 즐겁게 살고 싶다"며 오늘도 붓을 잡는다.

우울증 극복하려 잡은 붓 이제는 인생 최고의 즐거움

이인숙(84) 씨는 늦깎이 화가로 불린다. 일흔을 넘겨 처음 붓을 잡은 그녀에게 그 이상 어울리는 말은 없다.

하지만 이 씨에게 따라붙는 '늦깎이'라는 의미는 조금 다르다. 대부분 무슨 일을 늦게 시작한 사람에게 '늦깎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 씨에게 만큼은 '아직도'라는 의미가 함께 담겨있다.

그녀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 나이에 정말 대단하시다'며 엄지손가락을 내밀기 일쑤다. 그도 그럴 것이 여든넷인 올해 두 번째 개인전을 연 그녀는 지금도 1년이면 30호에서 60호 크기 캔버스를 10여개씩 채워갈 만큼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원주교육삼락합창단 단원으로, 유치원에서는 '이야기 할머니'로, 장애인합창단 봉사활동까지 나이가 무색할 만큼 다양한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그런데 웃음 많고 늘 유쾌할 것처럼 보이는 이 씨가 처음 붓을 잡은 계기는 우울증 때문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부부교사로 부러울 것이 없던 1996년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이 씨의 인생도 180도 달라졌다. 가망이 없다던 남편은 다행히 의식을 회복했지만 한쪽 몸을 전혀 쓰질 못했다.

35년간 정들었던 교직생활을 정리하고 그 때부터 남편 병수발에만 매달렸다. 혼자선 거동조차 못하는 남편을 위해 거실에 침대를 들여놓고 침대 밑 거실 바닥에서 쪽잠을 자면서 그렇게 10년 넘게 생활했다. 그 사이 원주기독병원부터 서울 재활병원, 한방 전문병원, 심지어 중국까지 용하다는 곳을 전전하며 입원과 치료도 반복했다.

이 씨의 정성 때문인지 남편의 병세는 조금씩 호전됐지만 오랜 병간호에 지친 이 씨에게는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런 이 씨의 숨통을 틔워 준 것이 그림이었다. 교직에 있을 때도 교과서 삽화를 곧 잘 따라 그려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그림에 대한 욕심보다는 지친 몸과 마음을 다잡기 위해 변화가 간절할 때였다.

2008년 지인의 권유로 노인종합복지관 서양화반에 나가기 시작했다. 남편이 치료받는 시간을 틈 타 그림을 배웠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이 싹트기 시작하자 1주일에 한 번의 수업은 성에 차질 않았다.

"시작은 어렵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 그림 그리면서 새삼 깨달아요"

마침 친구의 소개로 만난 정경훈(정화실) 작가와의 인연은 이 씨에겐 큰 행운이었다. 남편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1~2시간밖에 틈을 낼 수 없는 이 씨에게 다른 화실에서는 별도의 시간을 내어주길 꺼려했지만 정 작가는 주말이건 휴일이건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지 오라며 이 씨를 격려했다.

그 때부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모든 것을 잊고 그림을 그렸다. 완성된 작품을 들고 버스를 기다리는 데 "정말 할머니가 그린 거예요?"라고 묻는 주위의 반응에 어깨에 힘도 들어갔다. 손녀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재미도 생겼다. 지금도 이 씨의 아파트 거실 벽면에는 지금은 어엿한 20대 숙녀가 된 손녀들이 10여 년 전 그린 그림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면서 몸과 마음이 안정을 되찾자 우울증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3년 동안 완성한 작품이 당시 100여점을 넘어섰다니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그림을 그렸는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녀의 열정에 탄복한 정 작가가 나서 2012년에는 이 씨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그리고 7년 후. 지난 24일 치악예술관 전시실에서는 이 씨의 두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영월 한반도 지형부터 대관령 알펜시아, 중국 장가계까지 국내외 풍경이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이 씨는 "부부가 함께 교직에 있다 보니 단 한 번도 함께 여행을 가본 일이 없다"면서 "그 아쉬움 때문인지 요즘에는 여행지 풍경을 주로 그리게 된다"고 했다. 이어 나이가 들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도 조금씩 힘에 부친다며 "아마 남편이 살아있다면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 왜 하느냐고 역정을 내실지도 모르겠다"고 밝게 웃었다.

"가끔씩 그림은 남편이 끝까지 옆에 있어주질 못해 미안하다며 내게 남겨 준 선물 같다는 생각을 한다"는 그녀는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은 어렵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며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남은 여생도 그림과 함께 즐겁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이 씨의 두 번째 개인전은 오는 29일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