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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되돌아보며 또 다른 미래 설계

원주영상미디어센터 어르신 자서전 수업 수강생들의 자서전 모음 원주투데이l승인2018.12.19l수정2018.12.1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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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우리의 역사'를 주제로 원주영상미디어센터가 진행한 '어르신 자서전 수업' 수료자 네 분의 글을 게재합니다. 본문 글은 이들의 자서전 모음집인 '지금, 즐거운 인생'에서 발췌, 재구성했습니다.  <편집자 주>

오랜 시련 후 만난 행운택시

▲ 김 선 응(65·소초면)

아파트 경비직에서 쫓겨나는 날, 하늘에선 눈이 내렸다. 다 내 눈물 같았다. 속으론 '이젠 눈 안 치워도 돼' 하는 음성이 들리면서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또 다른 일이 있을 거야, 죽으란 법은 없어, 며칠 쉬다가 또 다른 경비직을 알아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가는 곳마다 무시만 당했다. 군에서 다쳐 남들처럼 날쌔게 빨리 일도 못 하고 힘든 일은 더욱 못하니 어디 써준다 해도 이젠 겁이 나고 슬펐다. 사랑하는 부인과 남매 자식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집안을 불행의 늪으로 빠뜨려버렸다.

잘나가던 한때인가. 옛날에 하던 중고 자동차 경매장, 중장비 경매장, 부동산업 하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왜 내가 이렇게 되었나! 양복에 넥타이만 걸고 점잖게 손님을 대하고 여유 있게 지내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다들 부러워하며 사십 대에 우뚝 선 나무처럼 기운차고 씩씩하고 목소리 크고 늘 싱글벙글 재미있었는데. 영원히 이렇게 살아가는 줄 꿈같은 생각만 했는데.

이제는 맏딸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아들도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지켜낸 부인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약속인, 삼 년 무사고로 열심히 하면 개인택시 사준다는 약속. 그저 희망을 잃지 않게 하려는 지나가는 헛약속인 줄 알았는데, 부인은 이 약속을 지켜서 나를 개인택시 사장으로 당당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누구도 담배를 끊게 못했는데
손주하고 놀기 위해 난 담배를 끊었다."


영업용 택시기사 할 때 쉬는 날 내 방 안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때 외손주가 자꾸 "할아버지, 놀자!" 하면서 머리를 들어 올렸다. 손주하고 신나게 놀고 나면 두고 간 장난감들이 생겼다. 차 안에 가지런히 싣고 다녔다. 다음에 손주 오면 아름다운 차를 보여주려고 액세서리도 달고 밤하늘의 별들을 다 택시 천정에 붙여놓은 것 같이 LED 조명등을 달았다. 담배 끊은 돈으로 과감히 투자했다. 그 누구도 담배를 끊게 해 주지 못했는데 손주하고 놀기 위해 나는 담배를 끊었다. 담배 끊은 돈 십오만 원을 월마다 아끼니, 꼭 손주가 연금 십오만 원을 주는 것 같아 기분 좋았다.

나의 택시를 이렇게 즐겁게 만들어 준 귀여운 외손주가 무척이나 고맙다. 거기다가 어떤 승객이 "행운택시!"라고 외쳐주었으니, 자신 있게 <즐거운 동화나라 행운택시>로 이름도 만들었다. 또 어떤 화가가 그림과 글씨로 아름답게 만들어 준 스티커도 있다.

나는 매일 택시 영업하는 것이 즐겁다. 이틀 운행하고 그다음 쉬는 날은 택시에 매달려 쓸고 닦고 장난감 등을 깨끗하게 손질하며 이 장난감과 책들이 손님에게 어떤 즐거움을 선사할까 기대해 본다. 어린이들에겐 신나는 놀이방 택시, 어른들에겐 추억의 놀이방 택시로 기분을 맞춰주고 있다. 삶에 지치고 아픈 환자들이 처음 승차 시 깜짝 놀랐다가 이내 옛 추억, 아프지 않았던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아픔도 잊은 채 즐겁게 나와 대화할 때면 너무나도 기뻤다.

처음에는 승객들이 뭐라고 비아냥거릴까 내심 걱정이 많았다. 정말 열 명 중 한 명은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운전 기능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 요즈음은 차를 탄 분들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많이 올린다.

나는 신나고 즐겁게 소통하는 베스트 드라이버맨이 되었다.

 

한눈 팔지 않았던 40년 6개월

▲ 장 헌 역(63·단구동)

1975년 12월 30일자로 황지우체국으로 발령되었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이제 사회인이 된다는 설렘과 동시에 '직장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불안감도 다가왔다.
당시 황지는 해발 700m의 고지대에 동양 굴지의 무연탄광업소가 다수 소재해 있어 인근 지역을 더하면 인구가 5만 명이 넘을 정도로 경제 여건은 매우 좋았지만, 급수시설이나 도로포장 등 사회적 기반시설은 열악했다. 빨래를 해도 밖에 널지를 못하고 겨울에 세숫물이 없어 이발소에 가서 돈을 주고 세수를 하고 출근을 하곤 했다. 읍내를 흐르는 냇물은 탄광에서 흘러나온 무연탄 침출수로 인해 검은색 물이 흘렀고, 평소에도 하늘에 탄 먼지가 떠돌다가 비가 내리는 날이면 거리는 완전 죽탕길이 된다.

처음 겪는 직장 업무는 매우 어려웠다. 아침 일찍 열차 편으로 운송되어온 우편물을 확인, 분류 등재하고 정시 출국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직원들보다 훨씬 일찍 출근해야 한다. 늦은 오후 외근직이 배달업무를 마치고 귀국한 후 인계, 확인, 마감까지 하려면 남들이 모두 퇴근한 뒤에 퇴근하는데 일에 서툰 나는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전산화되어 자동마감 처리되지만, 당시에는 모든 걸 수기로 처리하던 때라 많은 우편 물량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처리했다.

2009년 4월 15일,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 꿈꿔왔던 목표를 마침내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입사한 지 33년 4개월 만이요, 승진 다섯 번째였다. 기분이 묘했다. 그간의 직장생활을 돌이켜보니 긴 시간 참 열심히도 일했고, 치열하게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 남들보다 일찍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과욕하지 말고 잇속 챙기지 말고,
 더 보람된 나의 삶을 위해…"


일을 찾아서 하고 만들어서도 했으니 그 과정에서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승진 축하 만찬 중에 과장이 "실장님, 이제는 좀 느긋하게 일하시죠. 우리가 죽것심더" 하는 말에 이구동성 "옳소!"라 해서 한바탕 웃었다. 집에 들어가니 집사람 역시도 "이젠 제발 사람 볶지 말고 느긋하게 살아봐요"라며 축하가 아닌 핀잔을 줬다.

2016년 6월 30일, 공직생활 40년 6개월의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으며, 녹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이 순간이 있도록 해준 내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 미순 씨와 그간 못된 주인 만나 갖은 혹사를 당하면서도 꿋꿋이 주인을 섬기고 지켜준 나의 일신(一身)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퇴임 후 나는 공직생활에서 입었던 혜택을 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위해 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2014년 9월부터 매주 일요일 외국인 근로자 대상 한국어 강의, 2015년 7월 청소년대안학교에서 인성 강의, 2016년 1월 도문화운동협의회 시민 강사, 2016년 5월 등불야학에서 장애인 한글 강의, 2016년 9월부터는 장애인 보호 작업장에서 운영하는 종이컵 공장을 맡아 직접 기계를 돌리며 장애우들의 생활자립을 돕고자 즐거운 봉사활동으로 제2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 요즘 너무 바쁘게 활동하다 보니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단순히 우스개가 아니라는 것을 몸이 피곤함을 느끼는 데서 실감하고 있다.

과욕하지 말고 잇속 챙기지 말고, 더 보람된 나의 삶을 위해 아자! 아자!


그 시절, 중학생이 된다는 것

▲ 정 원 표(74·태장동)

나는 1945년 4월 5일,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부곡 2리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6·25전쟁으로 피난을 다녀야 했고, 넉넉지 못한 시골 농가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소먹이 꼴을 베어오기 위해 지게 지는 법과 낫질을 배워야 했다.

부곡초등학교에 다녔는데, 6학년 3월 초가 되자 상급학교에 갈 학생을 신청받았다. 나는 부모님께 여쭤보지도 않고 무조건 해버렸다. 이미 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형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던 것이다. 한만기 담임 선생님은 우리의 실력이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 주기 위해 밤에도 하숙방으로 불러 지도를 해 주셨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형 하나 학비도 어려운데 둘까지 보낼 수 없다고, 아예 시험 볼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어떻게 그런 배짱이 있었는지 이틀을 울며 떼를 썼다. 선생님께서도 우리 집까지 찾아오셔서 내 공부가 아까우니 꼭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하시니 부모님은 그럼 시험이나 한번 보라고 허락하셨다. 한만기 선생님은 나에게 앞날을 열어주신 분으로 그분과의 만남은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형을 따라 원주로 향했다. 치악산 고둔치 고개까지 올라가는 길에는 맑은 물이 떨어져 아름다운 폭포와 가재가 바위에 파인 구멍에 들어가 모여 있다는 가재바위가 있다. 고갯마루에 오르니 원주 읍내가 멀리 보였는데, 읍내는 돌담이 군데군데 있는 것 같았다. 형에게 원주 읍내에는 부곡의 밭처럼 돌담이 많냐고 했더니, 그것들 모두가 집이란다.

"학생복은 졸업할 때까지 입어야 해
 
바지와 소매를 접어 꿰매어 입었다."

형이 자취하는 집은 봉산동 개울가에 있었고 판잣집이었다. 원주중학교는 개울을 건너가면 비행장 옆에 있었는데 비행장도 비행기도 모두 신기했다. 원서를 접수하고 서둘러 혼자 어제 왔던 고개를 넘어오는데 무섭지도 않고 내가 마치 중학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원주에 외갓집이 있었던 사촌 형은 나와 달리 외가에서 다 지원해주었으니 한편 부럽기도 했다.

아버님은 어떻게 마련했는지 입학금을 내주었고 학생복과 가방, 학용품 등을 챙겨 주었다. 학생복은 졸업할 때까지 입어야 한다고 큰 것을 사서 바지와 소매 길이를 접어 꿰매어 입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 학생복을 입었으니 참으로 신바람이 났다. 그때까지 바지저고리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입학해 형과 함께 생활하다가, 형은 그해 봄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갑자기 형이 없으니 혼자가 된 나는 치악산 너머 집이 너무 그리웠다. 아버지께서는 봉산동 기차굴 앞에 방을 얻어 할머니와 함께 둘이 지내게 해 주셨다. 그런데 그해 가을 어머니께서 출산을 하다 문제가 생겼다. 동네 사람들이 산모를 들것에 태우고 메고 고둔치 고개를 넘어 도립병원에 갔으나, 결국 너무 늦게 가서 병원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당시 부곡은 교통수단이라고 해봤자 걸어 다니는 것이 유일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할머니께서는 살림을 하러 다시 부곡 집으로 가셔야 했다. 아버지께서는 일에서 손을 놓으시고 술로 세월을 보내고 계셨으니 나는 혼자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때 주인댁에서 나를 자식처럼 돌보아 주셨다.

이렇게 중학교 1학년은 지나갔다. 다시는 오지 않기를 바란다. 3년이란 세월이 가고 졸업을 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 최 종 우(64·일산동)

어머님께서는 1917년 6월 16일 경기도 연천군 적성면에서 출생하시어 2014년 8월 14일 캐나다에서 돌아가셨습니다. 98세라는, 1세기의 삶을 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아닙니다. 역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어낸 위대한 생애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동딸로 귀하게 자라시다 경기도 양평 시골로 시집오면서 층층시하의 시집살이와 농사일로 힘든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지만, 그중 바로 내 위의 형 1명을 병으로 잃고 7남매를 키우셨습니다.

평소 자식들에 대한 걱정으로 당신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옛날 분들이 다 그렇다고 하지만 자식 사랑이 유달리 더하셨습니다. 언제나 정성스럽게 보살펴 주시는 거친 손을 보면서, 철이 들기 전의 나는 당신께서는 그래도 되는 줄 아는 철부지였습니다. 온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하셔도, 찬밥 한 덩어리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우셔도, 한겨울 우물가에 앉아 맨손으로 빨래를 비비시고 방망이질 하셔도, '배부르다' 또 '생각없다' 하시며 식구들 다 먹이고 굶으셔도, 발뒤꿈치 다 헤져 풀 먹인 이불이 소리를 내고 쓸려서 아파도,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아도, 아버님이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당신인 줄 알았습니다.

"내겐 어머님이 억척스럽게 만들어 주신
 특별한 이불과 요가 있다."


선풍기 없던 시절, 우리들의 머리맡에서 더위도 모기도 쫓아주시던 당신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여름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대문간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감자와 옥수수를 삶아주시고, 아버님께서 잡아 온 민물고기를 튀겨주시던 어머님, 겨울엔 시원한 동치미를 떠다 주시던 어머님이 그립습니다.

모내기를 할 때부터 추수하여 거두어들일 때까지 일꾼들에게 새참을, 또 점심을 맛있게 준비해주시고 나르셨습니다. 동네 아낙네와 같이 감자 캐고, 콩도 베고, 옥수수를 따서 자루에 담아 집으로 나르셨습니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깨를 털고, 도리깨로 콩을 타작하시던 모습이 살면서 힘이 들거나 당신이 그리워질 때면 항상 떠오릅니다.

해마다 10월 하순과 11월 초순. 이맘때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인 특별한 '이불과 요'가 있습니다. 이 이불과 요를 대하면 왠지 모르게 더욱 포근하고 따사로운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어머님이 억척스럽게 만들어 주신 어머님 표 이불과 요입니다.

캐나다에서 당신과 함께 사시는 큰 누님댁에 갔을 때였습니다. 토론토의 브랜포드 산업단지를 찾아 나섰고 공장마다 내놓은 꾸러미들이 있었습니다. 헤치니 방림방직 공장의 자투리 옷감꾸러미가 있었고 뒤져서 쓸만한 천들을 모아 대여섯 개의 보따리를 만들어 싣고 집으로 왔습니다. 연세는 많았지만, 자식을 향한 마음에서는 언제나 기운이 나셨던 당신이라 곧 한국으로 돌아갈 아들을 위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능숙한 재봉틀 솜씨를 발휘하여 잘라내고 연결하여 뚝딱뚝딱 제작하시니 얼마 후 그것은 커다란 이불이 되고 요가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이 만들어 주신 이불과 요를 한국으로 가져온 나는 지금도 날씨가 추워지면 덮으면서 어머니를 다시 그리워합니다.

어머님, 당신의 아들로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원주투데이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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