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은 술이 아니죠. 술은 그저 우리가 어울리고 나누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술을 향한 일종의 신념 같은 것이 느껴질 만큼 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뜨거웠다. 협동조합 '주담'의 김원호 대표이다. 
 

 "약 25년 전이죠. 회사에 입사를 하고 엔지니어로 근무할 때 유난히 해외출장이 많았어요. 빡빡한 일과를 마친 뒤에는 함께 간 동료들과 술자리로 마무리하고는 했는데 그게 여기까지 온 거죠 뭐"라며 멋쩍게 입을 열었다.
 

 원주가 고향인 김 대표는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90년대 초반 대기업 현대 계열사에 입사, 20년이 넘도록 엔지니어로 살아온 그야말로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런 그가 뒤늦게 '전통주 연구가'라는 새로운 명함을 파게 된 계기는 뭘까. "세계 여러 나라를 돌 때마다 그 나라의 술을 맛 봤어요. 각기 다른 독특한 술 맛이 마치 그 나라의 첫인상처럼 강렬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때부터 전통주의 매력에 빠지게 됐죠."
 

 개성 가득한 각 나라의 전통주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술 공부는 그렇게 시작됐다. 2012년 북유럽으로 떠났다. 그 후로 6년 간 틈날 때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술을 맛보고 배웠다. 그렇게 찾은 나라만 십 여 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정서와 입맛에 맞는 전통주를 고민하고 연구했다. 충분히 마셔보고 취해보고 오랜 연구 끝에 4년 전에는 필드로 나섰다. 협동조합 '주담'이 바로 그것. '주담'은 술을 빚는 양조장이자 가양주 연구소다.
 

 제대로 된 전통주 제작과 더불어 올바른 술 문화를 이뤄가기 위해 그 뜻에 동의한 지인들이 뭉쳤고 협동조합 '주담'이 탄생했다. 술 '주' 이야기 '담'.
"처음에는 주위에서 다들 반신반의하고 놀리기도 했죠. 술 좋아하면 모두 술 연구가가 되는 거냐고요." 넌지시 던진 김 대표의 말에는 뼈가 있고 힘이 있었다.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게 되면 누구나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잖아요. 저 역시 술을 좋아하다보니 전문가가 된 셈이죠. 가는 나라마다 그 나라의 얼굴이라 할 만한 대표적인 전통주들이 하나씩 버티고 있는데 우리나라를 생각해보니 마땅한 전통주가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소주와 막걸리가 전통주 자리를 석권하고 있는 것도 김 대표에게 자극이 됐다. 우리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담아내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말해주는 전통주를 만들겠다는 것이 김 대표의 목표이자 협동조합 '주담'의 설립 이유다.
 

 사실 그런 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강주, 문배주와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주가 있고 강원도만 해도 원주의 '황골엿술'을 비롯해 강릉동동주, 정선의 앉은뱅이술 등 전통주라고 손꼽히는 몇몇 술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발효주는 만들 때마다 맛에 차이가 생기고 대량 생산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국산 원료가 절대 부족한 것도 전통주 성장에 제동을 건다.
 

 "술은 쌀과 물, 누룩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만들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세 가지를 어떤 원료로 만드느냐에 따라 술의 가치가 달라지죠. 사실 지금의 전통주들, 예를 들면 우리 지역에서 나는 막걸리도 원료의 절반 이상을 수입하고 있어 백퍼센트 전통주라 하기엔 무리가 있어요."  그래서 원주가 고향인 김 대표는 적은 양의 술을 빚더라도 우리 지역에서 나는 원료만 쓴다. 관설동에서 직접 농사지은 부모님의 쌀을 받고 지역에서 흐르는 물, 직접 빚은 누룩으로 술을 만든다. 그렇게 만든 술을 지난해 처음 선보였다. '주담'표 전통술 '모월'이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좁쌀한알>에 보면 모월산 이야기가 나와요. 그 모월산에서 영감을 얻어 술 이름을 '모월'이라고 지었어요. 뭐든 다 안고 품어주는 어머니의 품을 연상시키는 이름이죠." '모월'에는 특징이 있다. "많은 분들이 술을 드시고 난 후에는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그 말이 일리가 있어요. '아세트알데히드'라는 성분 때문인데요. '모월'은 초류와 후류를 많이 흘려보내 이 성분을 다량 제거했어요. 그래서 마시고 난 후에도 머리가 아프지 않죠."
 

 원주의 물과 쌀, 누룩으로만 만들어진 전통주 '모월'은 유약을 바르지 않은 숙성 전용 항아리에서 장기가 숙성된다. "술은 기다림이거든요. 발효하고 숙성하고. 단 시간에 수익을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지금도 회사와 주담을 병행하고 있어요. 회사가 전통주 만드는 자금줄이나 다름없죠."
 

 모월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주가 뚜렷한 색깔과 자부심을 갖도록 더 연구하고 도약하길 바란다는 김 대표. 술꾼으로 시작해 술 연구가가 된 그의 철학은 지금도 확고하다. "일본하면 '사케'를 떠올릴 만큼 일본의 술은 유명하고 역사가 깊죠. 하지만 거슬러보면 우리에게는 분명 일본보다 앞선 술 문화가 있었어요. 여러 가지 시대적 억압 속에 전통주 명맥이 끊어진 것뿐이죠. 이제라도 잃어버린 전통주 레시피를 복원하고 제대로 된 전통주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울러 좋은 술로 좋은 술 문화까지 구축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죠."
이것이 바로 뼛속까지 엔지니어인 그가 술을 만드는 이유다.
 

남미영 시민기자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