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동에 있는 부모님 집 안방에는 '守心正氣(수심정기)'라고 쓴 큰 붓글씨 액자가 30년 넘게 걸려있다. 무위당 선생님이 써주신 글로 '마음을 지켜 기운을 올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윽한 묵향(墨香) 속에 시류에 흐트러짐 없는 선비의 기개가 살아 숨 쉬는 듯한 붓글씨를 볼 때마다 36년 전인 1981년의 늦가을 밤 풍경이 눈에 선하다.
 

 당시에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 당했다. 서슬 푸른 정권에 밉보여 쫓겨난 공무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도 나는 집에서 칩거하면서 단절과 고립, 울분의 세월을 보낸 '아버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그때부터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고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나의 청소년기는 혹독했다.
 

 1981년 어느 가을 날 밤이었다. 저녁을 먹고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밖에서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건 일순 형님 목소리인데, 이 밤에 어쩐 일이시지?" 아버지가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와 무위당 선생님은 청년시절 봉산동 한 동네에 살면서 형님, 아우로 지내온 각별한 사이였다. 대문을 여니 벙거지에 회색 잠바차림을 한 무위당 선생님이 빙그레 웃고 계셨다. 약주를 드셨는지 선생님은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시내에서 친구들하고 저녁 먹으면서 반주 한잔 했네. 집으로 가다가 자네 생각나서 차 한 잔 얻어먹으려고 들렀네." 거실에 들어선 선생님은 집안을 쓰윽 둘러보았다. "자네 집에 내 붓글씨가 없는 걸 보니, 내가 여태 붓글씨를 써 주지 않은 모양이구먼. 오늘 내가 아우 집에 온 김에 먹장난이나 하고 가야겠네." 선생님은  하얀 화선지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버지는 벼루에 말간 맹물을 붓고 열심히 먹을 갈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오른손을 턱에 받치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선생님은 먹물이 큰 붓에 스미도록 듬뿍 찍은 후 신경을 붓 끝에 집중했다. 선생님은 조용히 호흡을 고른 다음 주저 없이 힘차게 붓글씨를 써나갔다. 종이 결 사이로 먹물이 스며들면서 우람하게 퍼져나갔다.
'修心正氣(수심정기)'. 선이 굵고 생명력이 넘치는 예서체(隸書體) 글씨가 완성되었다. 한 획 한 획 공력(功力)을 다한 글씨에는 붓결 따라 먹물의 응축된 힘이 살아서 꿈틀 거리면서 역동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어때,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들다마다요. 뜻이 참 좋습니다."
아버지의 대답에 선생님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에게 냉수를 청했다.
선생님은 벌컥벌컥 냉수 한 대접 다 들이키고 나서 아버지에게 뜬금없이 물었다.
"자네 김민기의 '아침이슬' 아는가?"
"형님, 제가 그 노래를 어떻게 알겠어요."
"야, 너는 민기가 만든 그 좋은 노래를 모를 수가 있냐? 내가 아침이슬 한 자락 불러도 괜찮겠지?"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지그시 눈을 감고 나직이 노래를 시작하는 선생님의 얼굴에는 애잔함이 깃들여 있었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목청을 높여 후렴 부분을 부를 때는 선생님의 얼굴에서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선생님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노래를 듣고 있는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았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마지막 구절을 끝내고 애틋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사람에게 엄청난 아픔이나 슬픔은 꼭 그만한 크기의 기쁨이 있어야 극복되는 게 아니다. 그 보다 훨씬 작은 기쁨으로도 극복되고 위로받을 수 있다. 예전에 독재정권 하에 감옥에 다녀오고, 감시를 당하는 모진 세월을 겪으신 선생님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후배가 겪고 있는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선생님은 가엾고 측은한 고향 후배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마음을 붓글씨와 '아침이슬' 노래로 표현하신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어둠이 짙게 깔린 밤길에서 무위당 선생님과 아버지가 작별인사를 나누던  풍경을 잊지 못한다. 골목이 끝나는 길모퉁이에서 "어서 들어가라"며 손을 흔들고 돌아서서 먹빛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는 벙거지를 쓴 노인과, 더 이상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가로등 아래서 망부석처럼 꼼짝 않고 서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 그 아련한 장면은 내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세월의 강은 흘러 무위당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23년이 지났고, 어느새 나도  50대가 되었다. 지금도 일산동에 걸려있는 '수심정기'를 볼 때 마다 무위당 선생님의 애잔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것은 이제껏 내가 들었던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 소리였다.